칼 푀르스터 Karl Foerster 1874-1970

[dropcap style=”default, circle, box, book”]독[/dropcap]일의 숙근초 육종가, 정원사, 정원 서적 집필가. 20세기 초 독일 정원에 혁신을 가져 와 독일 정원의 아버지로 불리기도 함. 정원사 직업을 가졌던 역대 인물 중 가장 큰 영향을 행사. 
  • 1874년 베를린 천문대 관사에서 출생. 
  • 1970년 향년 96세를 일기로 포츠담 보르님 자택에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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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생애와 업적


15세에 정원사가 될 것을 결심하고 정원사 교육을 받다

칼 푀르스터의 사진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사진. 자신이 육종한 제비고깔 ‘자개나무’앞에서 찍었다. 자개나무 Permutterbaum이라는 이름은 칼 푀르스터가 만들어 낸 것으로서 자개처럼 오묘한 색의 꽃이 나무처럼 크게 자란다는 뜻. 꽃잎은 하늘색이며 가운데 눈은 까만색. 키는 약 170-180cm. ⒸReimar Gilsenbach. 출처: 일곱 계절의 정원으로 남은 사람 163쪽

칼 푀르스터는 1874년 베를린에서 천문학교수 빌헬름 푀르스터와 화가 이나 파센 여사의 삼남 이녀 중 둘 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식물과 정원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칼은 15세에 정원인의 길을 가기로 결심하고 우선 삼년간 정원사 교육을 받았다. 이후 십여 년간 전통에 따라 유럽의 여러 식물원과 재배원을 전전하며 도제로서 경력을 쌓았다. 이 시기에 정원 관련된 다양한 분야 중 어떤 분야에 평생을 바칠 것인지 고민하던 중 우연히 스위스의 산 기슭 숲 속에 가득 핀 콜키쿰Colchicum autumnale이라는 숙근초를 보게 되며 “숙근초야말로 계절에 따라 풍경을 체험하게할 수 있는 열쇠”임을 이해. 이를 계기로 하여 숙근초 육종, 재배 및 분포에 전력하기로 결심한다.[1]칼 푀르스터 2013, p. 101

칼 푀르스터는 숙근초야말로 정원의 미래를 책임질 존재라 여겼다. 숙근초는 한국에서 야생화라 불리는 꽃으로서 초본류지만 다년생으로 짧게는 수년에서 길게는 수십 년까지 산다. 당시의 유럽 정원은 지금처럼 꽃을 많이 심지 않았으며 숙근초 재배와 보급이 막 시작되던 무렵이었다. 아마도 현재 한국의 상황과 비슷했을 것이다. 그의 예견이 적중하여 숙근초 정원에 대한 반응이 매우 컸으며 이후 지속적으로 발전하여 지금 유럽 정원 문화는 숙근초를 빼고는 상상할 수 없게 되었다.

포츠담 보르님에 숙근초 재배원과 전시정원 설립


삼십 대 중반에 포츠담 교외 보르님이라는 마을에 감자밭을 구입하여 “푀르스터 숙근초 재배 및 육종원” 설립. 그 후 9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60여 년 동안 보르님에 머물며 오로지 숙근초 육종과 글쓰기에 종사하여 총 362종의 신품종을 만들었고 27권의 책을 집필했다.

그의 목표는 처음부터 확실하여 가능하면 지구 전체를, 아니면 적어도 독일 땅 전체를 꽃으로 채우는 것이었다. 그에게 있어 정원은 직업이 아니라 삶의 전부였고 그에게 주어진 사명으로 이해했으며 이에 필요한 재능도 고루 가지고 태어났다. 식물이 가진 본질적인 가치와 가능성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능력, 달라진 암술과 수술의 형태까지도 집어내는 치밀함. 가장 강인하고 가장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기 위해 이십년을 기다릴 수 있는 끈기와 인내.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뛰어난 색채감과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음악적 재능으로 정원의 하모니를 연주해 내는 능력. 그리고 그것을 언어로 표현해 독자들에게 정원과 자연의 신비를 감동적으로 전달해 주는 능력까지 고루 갖췄다.

칼 푀르스터는 이런 능력으로 무장을 한 채 전 지구를 꽃으로 채우기 위해 세 가지 방법으로 접근했다. 우선 재배원을 통해 새로운 숙근초들을 만들어 보급했고, 글과 강연 및 정원잡지 발행으로 대중들에게 숙근초 정원의 새로움과 아름다움을 널리 알렸으며 (이를 위해 별도로 사진 기술 습득) 재배원 부지에 있는 사택 주변에 전시정원을 만들어 방문객들에게 개방했다. 정원사가 책을 쓰고 강연을 하는 것도 이례적인 일이었지만 자신이 재배한 꽃을 바로 정원에 심어 자라는 모습을 공개하는 것 역시 전례가 없었다. 새로운 꽃들의 육종, 글과 사진 그리고 ‘실물’을 볼 수 있는 그의 정원이 삼박자가 되어 정원문화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다.

(아래 사진들의 출처: 출처: 칼 푀르스터 아카이브. 베를린 국립도서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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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계절의 정원

재배원을 설립하고 십년이 못 되어 전국에서 ‘푀르스터 꽃’을 주문해 심는 것이 유행했으며 여기저기에서 정원을 만들어달라는 청탁이 들어왔고 방문객들이 줄을 이었다. 보르님 정원은 정원 문화를 소개하는 전시장이자 교육의 장소였으며 칼 푀르스터 자신에겐 연구의 장소였다. 여기서 나중에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는 ‘일곱계절의 정원’이라는 개념이 시작되었다. 일곱계절의 정원이란 꽃뿐 아니라 억새나 수크령같은 벼과식물에서부터 고사리까지 그리고 물론 수목들을 조합하여 초봄부터 늦가을, 겨울까지 “늘 피어있으며 늘 변화하는 정원”을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고 각 계절마다 두어 가지 꽃을 심어놓고 일곱계절의 정원이라고 할 수는 없으며 일곱 번이건 칠백 번이건 횟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세상이 다 꽃으로 채워진 상태”를 추구한다는 정원프로그램이었다.  

칼 푀르스터가 직접 찍은 사진. 선큰정원의 초창기 모습을 볼 수 있다.

칼 푀르스터는 설계과정 없이 정원을 만들었다. 직원 몇 명을 동반하고 차에 식물과 자재를 싣고 가서 현장에서 즉석 정원을 조성했다. 돌을 보면 그 안에 숨어있는 형상을 보였다는 로댕의 일화처럼 푀르스터의 경우 장소를 보면 정원이 보였다고 일컬어진다. 그 덕에 확실한 손길로 공간을 조성하고 식물을 배치할 수 있었으며 일종의 컨셉예술가들의 작업에 비할 수 있다. 

설계실과 시공사 설립


정원설계와 시공 주문이 증가하자 1927년 재배원 소속의 설계사무실을 차렸다. 칼 푀르스터 본인이 설계도를 그릴 줄 몰랐기 때문에 조경학을 전공한 젊은이들을 모집했는데 이때 채용된 두 명의 조경가가 훗날 독일 조경계의 양대 산맥이 되는 헤르만 마테른헤르타 함머박허 부부였음. 이렇게 해서 유명한 푀르스터-마테른-함머바허 삼인방 시대가 열렸으며 향후 동서 독일의 분단되는 1948년까지 이십 년간 지속되었다. 곧 시공사도 차리고 뮌헨과 쾨니히스베르크 (지금 러시아)에 각각 지부를 두었다. 푀르스터 자신은 사업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어 직원들이 챙겨주지 않았다면 파산했을 위기가 여러 번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인재 채용의 근거가 “저 친구는 바흐를 기가 막히게 연주하잖아.” 라거나. “저 친구는 시를 잘 써.” 혹은 “괴테를 좋아한다는데.” 이런 식이어서 투철한 이성의 소유자들인 마테른과 함머바허가 뜯어말리지 않았다면 일이 어려워질 뻔 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고 한다.

한편 전시정원의 개념을 보르님에 국한시키지 않고 보다 널리 알리기 위해 포츠담 시를 설득하여 우정섬에 최초의 공공 전시정원 조성하게 된다. 1937년 헤르만 마테른이 설계하고 1939년 준공되었다. 같은 해에 세계 이차 대전 발발. 칼 푀르스터의 삶과 숙근초 재배원에도 큰 변화가 찾아오게 되었다.

독일의 분단과 포츠담


푀르스터 숙근초 재배원의 판매장의 현재 모습. © Jeong-Hi Go

전시에는 원예 재배장 일부를 채소밭, 감자밭으로 전환, 식량 생산에 참가하기도 했으나 후방에서는 사실상 정원 조성 작업이 지속되었다. 전후 독일이 동서로 갈라지자 쾨니히스베르크의 지부는 소련의 영토가 되어 저절로 포기되었고 뮌헨의 지부는 그곳으로 파견 나갔던 직원이 분단을 틈타 자기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헤르만 마테른과 헤르타 함머박허는 1948년 고심 끝에 서쪽으로 이주했고 칼 푀르스터는 동독의 영토가 되어버린 포츠담에 남았다. 이때 이미 칠순이 넘어 삶의 터전을 옮기기도 어려웠지만 포츠담에 주둔한 소련지휘관이 마침 푀르스터의 명성을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정원애호가여서 그의 비호를 받게 된 것이 원인. 보르님의 재배원은 이제 “월동력이 강한 숙근초 및 정원식물적용법 연구기관”이란 이름으로 전환되었다.

소련군이 물러가고 이어 건설된 동독, 즉 독일인민공화국의 전폭적인 후원을 받으며 전쟁으로 주춤했던 육종사업이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 1950년부터 수많은 신품종을 다시 내놓게 되었다. 동독정부가 공산당원도 아닌 칼 푀르스터를 적극 후원한 배후에는 그의 명성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의도가 컸다. 민심을 다독이고 ‘인민이 세우는 새로운 낙원’을 선전하기 위해서도 정원이 중요한 요소였다. 실제로 동독정부는 정원문화를 크게 독려했음. 이를 위해 칼 푀르스터를 구심점으로 내세우고 그에게 훔볼트 대학의 명예박사학위, 명예교수 직위를 주었으나 1970년, 칼 푀르스터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사업장과 집, 정원을 모두 몰수하여 국가 소유로 전환시켰다. 그러나 1981년에는 보르님의 자택과 정원을 문화재로 지정하고 포츠담 시에서 계속 관리했다.

독일 통일 이후


포츠담 보르님에 위치한 칼 푀르스터 정원의 현재 모습. © Jeonghi Go

통일 이후 1993년, 딸 마리안네 푀르스터에게 집과 정원이 되돌려졌다. 재배원은 푀르스터의 제자가 맡아 “푀르스터 숙근초Foerster Stauden”라는 유한회사형태로 부활했고 마리안네 푀르스터는 이사의 자격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보르님 자택 옆에 위치한 푀르스터 숙근초 재배원은 지금도 존재한다.

2001년 포츠담에서 개최된 연방 정원박람회의 일원으로 보르님 정원이 복원되었다. 2010년 마리안네 푀르스터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한 지인이 기금을 내어 놓아 독일 연방 문화재단과 포츠담 시가 공동으로 마리안네 푀르스터 재단 설립했다. 포츠담 시에서는 정원을 영구적으로 보존 관리할 책임을 지고 정원사 2인을 고용하고 있으며 문화 재단에서 사택 복원사업 지원. 2018년 3월 현재 보수공사가 거의 완료되어 곧 기념관으로 오픈될 예정이다.

칼 푀르스터는 1970년에 96세로 세상을 떠났지만 오늘도 그의 영향력은 생생하게 살아 있어 그가 표방한 “일곱계절의 정원 (Garten der sieben Jahreszeiten)”과의 씨름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칼 푀르스터의 정신세계와 <정원 신학>


칼 푀르스터 아니어도 좋은 품종을 만들어 낸 육종가는 많다. 좋은 정원 책을 쓴 작가들은 그보다 더 많을 것이다. 그리고 정원디자이너로 명성을 떨친 사람들 역시 많다. 그러나 그럼에도 독일정원 역사에 칼 푀르스터만큼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 없다는 사실 그리고 그를 가까이에서 알던 사람들이 왜 그리 그에게 열광했는가는 설명되지 않는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그의 사상과 인간됨을 함께 살펴야 한다.

정원사의 직업 중 가장 즐거운 것 중 하나는 식물과 정원에 대한 기쁨이 사람을 만나는 기쁨으로 연결된다는 점이다. 서로 대화 없이 지나치던 사람들도 이제 정원에서 서로 즐겁게 대화를 나누며 소통하게 되었다. 식물이 점점 더 커지고 더 아름다워지는 것과 병행하여 사람들 역시 더 크고 아름답게 성장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gap height=”20″]

그 자신의 발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는 꽃의 세계에 숨어 세상을 외면하고 살지 않았다. 그가 궁극적으로 추구한 것은 꽃과 사람을 서로 가까이 다가가게 해 주는 거였다. 꽃이 아름다워지는 것과 인간이 아름다워지는 것이 같은 것이란 그의 믿음은 두 번의 전쟁을 겪으면서도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아름다움이 언젠간 세상에서 지옥을 사라지게 할 것이다.”라는 믿었던 그에게 꽃과 정원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들려주었던 과거 인류의 황금기를 되찾게 할 수 있는 매체였으며 그런 의미에서 그의 육종사업과 정원은 종교적 행위였다.

칼 푀르스터 사고체계는 직관과 감성에 기초하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를 일컬어 “신비주의자”라고 정의한바 있다. 독일의 신비주의는 대개 종교와 직결되는 개념으로 해석되며 초월적인 것을 믿고 초월적인 세상을 오가는 사람이라는 뜻도 있지만 신비체험을 한 사람이라는 구체적인 뜻도 가지고 있다.

그의 부모는 자유정신을 추구하는 지식인으로 자녀들의 종교교육을 거부했었다. 무신론자는 아니었지만 기독교의 도그마적 이론, 소위 기독교 정신에 입각했다고 주장하는 프러시아적 훈육법 들을 정면으로 부정했다. 그대신 삶을 통해 종교적 가치를 직접 구현해 보인 부모의 영향이 컸다.

칼 푀르스터의 경우, 기독교와 관련하여 유일하게 인정하는 부분이 예수의 의미였다. 열다섯 살에서 스무 살까지 지병으로 인해 인생의 큰 고비를 겪게 되며 스무 살 때 스위스 산 속 어느 교회에서 신비체험을 한다. 본인이 이 부분에 대해선 상당히 말을 아끼다가 94세의 고령으로 쓴 짧은 수기, “어느 잊지 못한 여행의 멜로디”에서 그 때의 일을 조심스럽게 언급하고 있다. “나는 신비주의자다”라는 고백과 더불어 크리스트에 대한 깊은 이해와 사랑을 표현한 글이 몇 편 남아 있다. 그 외에는 종교에 대한 구체적 언급이 없지만 종교성을 제외하고 그의 글과 삶과 정원을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 다만 그의 종교는 “아직 부를 이름이 없을” 따름이다. 막연하게나마 표현한다면 우주를 있게 한 거대한 힘’, 즉 초월적인 것에 대한 깊은 믿음과 중재자로서의 예수에 대한 인식, 그리고 ‘판Pan’으로 대표되는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동질감, 아름다움에 대한 종교적 믿음 등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꽃으로 해석한 독특한 그 만의 세계관을 만들어 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그는 그 만의 정원신학을 개발했으며 그가 육종하고 개량해 낸 꽃들이 바로 그의 복음이었다. 이를 ‘푀르스터리즘Foersterism’이라 칭하기도 한다.

칼 푀르스터와 보르니머 파


보르니머 파의 구성원들이 오랜만에 다시 모여 즐거운 시간을 함께 했다. 칼 푀르스터 부부, 헤르타 함머박허(칼 푀르스터 왼쪽), 그 옆에 헤르만 마테른이 보인다.

헤르만 마테른은 칼 푀르스터를 정원 왕국의 황제라 칭한 바 있다. 그러나 정원은 그에게 있어 왕국이라기보다는 신전에 가까웠다. 그의 신전, 즉 집과 정원은 늘 열려 있어서 항상 많은 사람들이 스스럼없이 드나들었다. 정원에서 꽃을 감상하는 사람들, 거실에서 부인과 카드놀이 하는 친구들, 사무실에서 설계도를 놓고 열띤 토론을 하고 있는 직원들, 묘포장에 엎드려 땀을 흘리는 실습생들, 그러다가 이층에서 피아노 연주소리가 들려오기도 하고 끼니때가 되면 커다란 식탁에 가득 모여 앉아 함께 식사를 했다. 늘 흰색 양복에 중절모를 쓰고 넥타이까지 단정히 매고 있었던 칼 푀르스터는 새 소리, 꽃향기, 사람들의 웃음소리 사이를 오가며 우스갯소리를 섞어 일일이 설명해주었고 작별할 시간이 되면 누구나 꽃다발을 하나씩 꺾어가지고 가게 했다.

어둠이 내리면 비로소 그의 서재에 녹색 전등이 켜지고 밤늦게까지 꺼지지 않았다고 이웃들이 전한다. 그의 이웃들은 알고 보면 그의 식구들과 다름이 없었다. 그의 직원들이 주변에 집을 짓고 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르님은 더더욱 왕국같은 느낌을 주었을 것이다.

그의 정원 왕국 혹은 신전을 거쳐 간 많은 인재들이 전후 독일 정원세계의 기둥이 된다. 칼 푀르스터 숙근초재배원과 시공사가 각각 교육기관으로 인정되었으므로 여러 세기에 걸쳐 수백명의 정원사를 양성했을 뿐 아니라 설계실을 거쳐 간 인물들도 적지 않다. 이들이 각각 동서 베를린, 카셀, 함부르크, 뮌헨, 드레스덴의 교수로 부임하거나, 여러 도시의 도시계획부, 녹지청의 우두머리가 되어 보르님에서 개발된 보르니머 스타일을 널리 전하게 된다. 전국에 흩어져 각자 자기 분야에서 최고의 위치를 차지한 인물이 된 후에도 그들은 보르님으로 향한 발길을 멈추지 않았다. 장벽이 있었어도 서독에서 동독을 방문하는 건 허용이 되었으므로 자주 보르님에 모여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이들을 일컬어 “보르니머파” 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 중에는 정원사, 조경가만 있는 것이 아니라 건축가, 화가, 시인들도 포함되어 있어서 일종의 문화 모임 같은 성격을 띠었다. 이 모임을 사람들은 칼 푀르스터라는 태양 주변을 회전하는 행성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태양이 사라지면 행성 역시 궤도를 잃고 우주에 뿔뿔이 흩어지듯 칼 푀르스터 사후에 보르니머파 모임 역시 사라졌다. 지금은 보르니머파 마지막 구성원까지 모두 세상을 떠났지만 그들이 남긴 말과 글이 있어 칼 푀르스터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제왕이니 태양이니 불렸다고 해도 칼 푀르스터는 흔히 말하는 강한 카리스마의 소유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카리스마라면 둘째가 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칼 푀르스터 재단을 설립한 헤르만 마테른 교수였다. 그런 그가 유일하게 ‘모시는’ 인물이 칼 푀르스터였다. 마테른은 칼 푀르스터에 대해 그처럼 젊은 나이에 이미 자신의 천재성과 능력을 “현명함”으로 승화시킨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회상했다.

보르니머 스타일, 뉴웨이브 스타일, 뉴저먼 스타일


독일엔 곳곳에 푀르스터의 이름을 따서 만든 정원이 있다. 모네 정원, 헤세 정원 등 정원 소유자의 이름을 붙여 부르는 유명한 정원들이 더러 있지만 《칼 푀르스터 정원》이라고 불리는 정원들은 칼 푀르스터가 만든 것이 아니고 그의 정원개념을 따라서 만든 정원들이다. 그건 일곱계절의 정원과 함께 정원을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게 한다는 칼 푀르스터의 유지를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제자들이 독일의 큼직큼직한 현상공모를 모두 휩쓸면서 드레스덴 (1936), 슈투트가르트 (1939), 카쎌 (1950), 쾰른(1954, 1974), 에르푸르트(1950, 1961) 등 각 정원박람회에 숙근초가 넘쳐나는 아름다운 정원을 조성했고 그것이 전통이 되어 지금까지 각 정원박람회에 푀르스터 정원이 들어서지 않는 곳이 거의 없다. 이는 그가 창조한 일곱계절 평화의 정원 개념이 바로크 정원, 르네상스 정원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하나의 정원양식으로 확립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뉴저먼 스타일의 대표 주자에 속하는 카시안 슈미트 교수의 식물 조합. © Cassian Schmidt

칼 푀르스터의 정원은 볼프강 외메Wolfgang Oehme (1930-2011)라는 인물을 통해 미국에 까지 전파된다. 볼프강 외메는 칼 푀르스터에게 교육을 받은 사람은 아니었다. 칼 푀르스터의 제자가 되고 싶었지만 상황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었다. 1957년 미국으로 이민을 갔으며 칼 푀르스터가 정원으로 끌어들인 벼과식물에 매료되어 이들을 주제로 한 정원을 도입하여 소위《뉴 웨이브 스타일》을 만든다. 한편 네덜란드 출신의 피트 아우돌프Piet Oudolf(1944-)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그와 함께 한국에서도 널리 알려진 뉴욕의 하이라인 프로젝트에 참가하기도 했다.[2]슈테판 레퍼르트. 풀꽃들과 함께 한 정원인생. 볼프강 … Continue reading

한편 칼 푀르스터의 제자 리하르트 한젠Richard Hansen(1912-2001)은 뮌헨-바이헨슈테판 대학 교수로 부임한 후 대학부설 전시정원을 조성하고 십여 년에 걸친 연구과정을 거쳐 숙근초적용법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했다. 일곱계절의 정원개념에 근거를 두었지만 예술적 감각에 크게 의존하던 칼 푀르스터의 방법론에 과학적인 접근법을 접목시킨 것이다. 이 때 한젠 교수에 의해 서식처와 식물생태 및 식물사회학에 입각한 식물적용법이 개발되었다. 이 방법론은 “일곱계절의 정원은 실현이 거의 불가능하다” 라는 통념을 깨고 숙근초 정원을 보편화하는 데 크게 일조하게 된다. 리하르트 한젠 교수에게 사사 받은 뮌헨-바이헨슈테판 대학 출신의 조경가들이 또 다시 전국에 퍼져 활동하며 한젠 교수의 방법론을 적용했다. 서식처 별로 식물생태 및 식물사회학을 감안하여 조성한 이런 정원들은 곧 영국 평론가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뉴저먼스타일》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았다. 영국의 크리스토퍼 브레들리 호울과 페넬로페 홉하우스 등이 뉴저먼스타일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했다.

독일 조경가들이 뉴저먼스타일이라는 명칭을 수용하기 시작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현재 뉴저먼스타일은 2세대 째를 맞고 있다. 이들의 특징은 바삐 돌아가는 현대사회의 템포에 부응하기 위해 조성이 간편하고 관리가 거의 필요 없도록 숙근초정원을 패턴화했다는 것이다. 뉴저먼스타일은 현재 공원이나 도시정원을 빠른 속도로 정복해 나가고 있는 중이다. 이렇듯 외메, 한젠 등을 통하여 칼 푀르스터의 정원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다른 한 편 지나친 기능주의로 인해 칼 푀르스터의 《정원신학》이 사라져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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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4   3월 9일 베를린에서 출생
1880   베를린 프리드리히 빌헬름 김나지움 입학
1889-1891   슈베린 궁 소속 식물원에서 원예사 교육수료
1892-1903

 

 

  포츠담 원예학교에서 수학. 같은 곳에서 도제로 일을 시작했으나 지병으로 인해 오래 중단.

독일의 알텐슈타인, 마이닝엔, 가이젠하임 식물원에서 원예사로 근무,

이태리의 보르디게라에서 원예사로 근무

독일 아렌스베르크에서 원예사로 근무

1899   사진 활동 시작
1903-1907   부모님 자택 정원에서 소규모의 숙근초재배원 설립
1907   첫 번째 푀르스터숙근초 카탈로그 발행
1910   포츠담의 보르님의 농지 구입. 신규사업장 설립.
1911   첫 저서 “월동이 잘되는 신세대의 숙근초와 꽃관목” 출간
1912

 

  보르님 재배원 부지에 자택 건축.

선큰정원 조성시작

1917   저서 “꽃피는 미래의 정원” 출간
1920   제비고깔 육종에 첫 성과를 거둠. Delphinium-Elatum ‘Berghimmel(먼산의 하늘)’
1920-1941   정원전문잡지 ‘정원의 아름다움’ 발간. 공동발간인: 오스카 퀼, 카밀로 슈나이더
1927   에바 힐데브란트와 혼인 (1902-1996)
1928   헤르만 마테른, 헤르타 함머바허와 함께 설계사무실 설립
1931   1월 1일, 딸 마리안네 출생
1932   풀협죽도 육종에 성공. 재배 및 시판. 첫 품종: Phlox paniculata ‘Wennschondennschon벤숀덴숀‘
1934   저서 “정원은 마법의 열쇠” (로볼트 출판사) 출간
1936   저서 “암석정원의 일곱계절” 출간
1937 저서 “침묵을 깬 행복” (로볼트 출판사) 출간
1939   포츠담 우정섬에 전시정원 조성
1940

 

  저서 “정원의 파란 보물” (레클람 출판사) 출간

숙근초 헬레니움 (태양의 신부) ‘Kupferstrudel (구리샘)’ 육종 및 출시

~1945   전쟁으로 인한 재배사업 중단
1945   소련군 포츠담에 주둔. 소련 주둔정부가 푀르스터 재배원을 “월동성 숙근초 재배 및 연구기관”이라는 이름으로 편입하여 보호에 들어감
1946-1948   모스크바 소재 소련 과학 아카데미의 요청으로 푀르스터 자서전 및 육종사업에 대한 업적 집필
1949   푀르스터 카탈로그 소규모로 재발간
1950

 

  베를린 훔볼트 대학 명예박사 수여.

이후 구절초(Chraysanthemum), 가을아스터(Aster), 초롱꽃(Campanula), 헬레니움 (Helenium), 제비고깔(Delphinium), 하늘바라기(Heliopsis), 양귀비(Papaver), 루피너스(Lupinus), 풀협죽도(Phlox), 꼬리풀(Veronica), 유카(Yucca) 등 수많은 육종 결과가 쏟아져 나옴.

1952   저서 “정원의 새로운 빛‘ (노이만 출판사) 출간
1959

 

  포츠담 명예시민으로 선정됨.

저서 “경고와 격려” (유니온 출판사) 출간

1962   저서 “탄식은 이제 그만” (유니온 출판사) 출간
1964   베를린 훔볼트 대학 명예교수
1965   칼 푀르스터 재단 설립. 베를린 공대 교수이자 칼 푀르스터의 오랜 지기이며 동료였던 헤르만 마테른 교수의 주창으로 칼 푀르스터의 이념에 입각한 식물 적용 및 연구지원사업을 목적으로 설립 됨. 베를린 공대에서 재단 설립 자금 지원.
1968   저서 “늘 피어있는 정원” (유니온 출판사) 출간
1970

 

  11월 27일 칼 푀르스터 96세를 일기로 사망

그의 사망과 더불어 푀르스터 숙근초재배원이 동독 국가재산으로 ‘몰수’됨.

1982   미망인 에바 푀르스터와 유니온 출판사 편집부가 공동으로 칼 푀르스터의 글과 칼 푀르스터에 대한 글을 모아 “어느 정원에 대한 기억”이라는 제목으로 편저 출간.
1993   푀르스터 숙근초 재배원이 유한회사의 형태로 부활됨. 딸 마리안네 푀르스터 이사의 신분으로 참여.
1996   5월 4일 에바 푀르스터 94세를 일기로 사망
2010   3월 30일 마리안네 푀르스터 79세를 일기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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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 Karl Foerster, Ein Garten der Erinnerung. Ulmer 1992
  • Stefan Leppert, Zwischen Gartengräsern: Wolfgang Oehme und seine grandiosen Gärten in der Neuen Welt. DVA 2008.
  • 칼 푀르스터, 일곱 계절의 정원으로 남은 사람 – 정원 왕국의 칼 대제, 푀르스터를 만나다. 나무도시 2013
  • 마리안네 푀르스터, 내 아버지 칼 푀르스터의 정원에서 보낸 일곱 계절, 나무도시 2013
  • 고정희, “칼 푀르스터와 일곱계절의 정원”, 월간 환경과조경 2004년 10월호 통권 제19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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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각주
1 칼 푀르스터 2013, p. 101
2 슈테판 레퍼르트. 풀꽃들과 함께 한 정원인생. 볼프강 외메와 그의 신세계 정원. DVA출판사. 2008. 18 쪽 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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