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모더니즘

포트스 모더니즘은 근대 이후의 사회, 문화와 예술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근대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했으므로 탈근대화라 시대라 할 수 있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대표자들은 근대의 혁신 사상이 이미 균일화, 자동화되었다고 보았다. 근대의 논리가 사회의 총체적 원칙을 지배하는 것이 더 이상 합당치 않으며 독주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으므로 탈피해야 한다고 보았다. 모든 것을 통일하고 일원화하려는 일차원적 사상이라 비난하고 문화의 다양성을 긍정해야 한다고 했다. 특히 예술 분야에서의 개방성을 요구했으며 이런 관점에서 근대 미학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대개 1980년대에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다. 포스트 모더니즘 사상은 단지 시대에 대한 분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근대의 독선을 극복하고 대안을 제시하려는 비판적 움직임이라고 본다.

목차

개념


포스트 모던이라는 개념 자체는 1870년 경 처음으로 나타났다. 당시 이미 시작된 사회적 복합성과 다원성을 설명하고 문화의 발전 양상을 평가하기 위해 도입했다. 예를 들어 1870년 경 영국 화가  존 워트킨스 채프맨은 프랑스 인상파 미술을 초월하는 새로운 회화 스타일[1]Postmodern style of painting이 필요하다고 말한 바 있다.

1917년에는 루돌프 판비츠가 문화개념을 철학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포스트 모던이란 용어를 썼으며 1926년에는 새로운 영적 세계에 대한 종교적 포스트 모던의 개념이 나타났다.

1947년 아놀드 토인비는 문학에서는 이미 1875년부터 탈근대의 경향이 시작되었다고 설명했으며  1977년에는 찰스 젱크스가 건축의 포스트 모더니즘을 주장했다.

이론화 과정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롤랑 바르트Roland Gérard Barthes 등 일련의 프랑스 철학자들이 개념 정립에 몰입했으며 이때 포스트 모더니즘의 개념이 세분화하여 해체주의, 탈 구조주의, 담론 분석 등의 새로운 방법론이 개발되었다. 이들 평론가들은 포스트 모더니즘이라는 개념 자체를 비판적으로 보고 있으며 세분화하여 고찰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개념의 정립


프랑스 철학자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Jean-François Lyotard, 1924 -1998)가 나타나면서 비로소 포스트 모더니즘이라는 개념이 보편화 되었다.  그는 1979년 <근대 이후의 지식>이라는 글을 발표하여 근대는 실패했다고 주장하고 이를 세부적으로 진단했다. 근대 사회는 하나의 체계, 예를 들어 신, 주체, 합리성 등의 단일 개념으로 세상 전체를 설명하기 위해 사회의 복합성과 다원성을 무시하고 평준화했다고 비판했다.  리오타르는 근대의 일원적 사상 체계를 크게 계몽주의, 이상주의 및 역사주의로 구분했다. 탈근대 사회에서 이들 개념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으며 방향성을 제시하지 못한다고 설명했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요소


포스트 모더니즘은 <혁신>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으며 기존의 아이디어의 재조합을 추구한다. 불변의 원칙으로 인지했던 <인류의 발전>이 더 이상 목적이 아니라고 본 것이다. 세상은 확실한 것이 아니며 그보다는 오히려 혼돈스러운 복수 체계와 우연으로 짜여진 것이라 보았다. 인간도 만물의 영장이기 보다는 불안정한 존재이며 수많은 문화적 요소들에 의해 지배되는 존재로 정의했다. 문화의 전달 매체로서 대중 매체와 기술 분석에 역점을 두었으며 <담론 분석>과 <해체주의>가 인문학과 예술학의 기법으로 등장했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사상적 특징은 아래와 같다;

  • 근대의 계몽주의에서 핵심이 되었던 <이성> 및 <목적 합리성>의 거부
  • 독립적 주체의 상실
  • 인간의 한계와 감성에 대한 새로운 관심
  • 철학, 종교 등에서 주장하는 유니버설한 진실의 존재에 대한 거부
  • 전통의 울타리, 사회적 결속 등의 상실
  • 수많은 평행 사회의 공존
  • 사회적 문화적 관대. 문화와 예술, 사회 분야에서 특히 자유로움와 극단적 다원주의 등장.
  • 해체, 견본, 코드 믹스 등이 새로운 문화적 경향이 됨.
  • 세상에 대한 표현 기법의 증가
  • 민족주의, 인간 중심주의로부터의 탈피

건축의 포스트 모더니즘


뉴욕의 소니 빌딩. 구 AT&T  빌딩. 포스트 모더니즘 건축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Photo: David Shankbone. License: GNU1.2.

건축에서는 1960년대에 미국에서 특정 경향을 보이기 시작하다가 1980년대에 서구 사회 전체로 번졌다.

포스트 모더니즘 건축에서는 지나간 건축 양식을 반드시 극복해야 한다고 보지 않고 오히려 양식의 보물 창고로 보았다. 중요한 것은 건물의 기능 충족이며 외형에서는 지나간 여러 양식 중에서 요소들을 서로 조합하는 시도를 보였다. 19세기의 역사주의와는 구분된다. 역사주의에서는 지난 양식을 고스란히 재현하는 경향을 보였다면 포스트 모더니즘 건축은 지난 양식 중 특정 요소들을 인용하는 데 그친다. 그러므로 건축의 형태가 그 기능에 부합해야 한다는 기능주의 역시 부정하고 less is more라는 미스 판 데어 로어의 원칙도 거부했다.[2]예를 들어 렘 콜하스는 만약 적은 것이 많은 것이라면 무는 … Continue reading

필립 존슨이 1978-84 사이에 뉴욕에 건설한 AT&T 빌딩, 현 소니빌딩이 포스트모더니즘의 표상을 여겨지고 있다. 건물 상부의 장식은 18세기의 유명한 영국 가구 디자이너 치펜데일의 괘종시계를 본 뜬 것이다.

룩셈부르크 출신의 건축가 형제 롭 크리어와 레온 크리어, 영국의 테리 페럴, 독일의 오스발트 마티아스 웅거스, 이탈리아의 알도 로시 등이 초기 포스트 모더니즘 대표 건축가로 꼽힌다.

조경의 포스트 모더니즘


대개는 파리의 라 빌레트 공원 현상 공모 ‘과정’을 조경의 포스트 모더니즘의 탄생기로 보고 있다. 당선작 뿐 아니라 렘 콜하스의 차선작 역시 열띤 담론의 대상이 되었다. 중요한 것은 라 빌레트 공원에 대한 담론을 계기로 조경 자체가 도시 공간에 대한 토론의 중심에 들어서게 되었다는 점이며 이를 기점으로 본격적인 조경의 포스트 모더니즘이 시작되었다.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다른 모든 분야와 마찬가지로 자유로움과 다원성이다. 조경은 이러해야 한다는 사회적 통념에서 벗어나 프로젝트 별로 자유롭게 개념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으며 자연 환경, 도시 환경 뿐 아니라 사회, 역사, 이용자들의 주체성 까지 감안하는 포괄적 과정으로 발전했다. 근대 사회에서 정의되었던 조경의 역할, 즉 좋은 조경으로 사회의 복지에 기여 한다거나 정원은 파라다이스라거나 하는 등으로부터 자유로워졌으며 조경에서 전통적으로 고려하지 않았던 분야도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조경의 폭이 매우 넓어졌다. 생태, 기후변화 등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수용하는 한편, 전통적 조경, 전통적 정원 개념을 거부하지 않는 등 오히려 무한한 스팩트럼을 가지게 되었다.

 

참고문헌


  • Kühne, Olaf (2012): Stadt – Landschaft – Hybridität. Ästhetische Bezüge im postmodernen Los Angeles mit seinen modernen Persistenzen. Wiesbaden: VS Verlag für Sozialwissenschaften (RaumFragen).
  • Rein-Cano, Martin; Folkerts, Thilo (2012): Landschaft als Teil des kulturellen Diskurses. In: Garten+Landschaft (12), S. 22–23.
  • Welsch, Wolfgang (1991): Unsere postmoderne Moderne. 3., durchges. Aufl.: Acta humaniora.

 

© 서양 정원사 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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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각주
1 Postmodern style of painting
2 예를 들어 렘 콜하스는 만약 적은 것이 많은 것이라면 무는 전부인가? 라고 꼬집기도 했다.
3 Jellicoe 1991: 362;Steenbergen 2003: 33
4 Mazzini;Martini 2004
5 피렌체의 조각가. 중세에서 르네상스 풍을 유도해 낸 선구자로 알려졌다.
6 1377-1446, 피렌체 르네상스의 선구적 건축가. 필생의 역작으로 피렌체 돔을 설계하고 완성시켰으며 특히 대형 둥근지붕을 최초로 완성시켜 널리 이름을 떨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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