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노 타우트 Bruno Taut (1880-1938)

1880년 5월 4일 프로이센의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출생

1938년 12월 24일 터기 이스탄불에서 사망


브루노 타우트 1910년경

독일의 건축가, 도시설계가. 신건축양식의 대표자 중 한명으로서 특히 1910~20년대에 베를린, 막데부르크 등에 건설한 다수의 대형 주거단지를 통해 큰 명성을 얻었다. 당시 프러이센의 영토에 속했던 쾨니히스베르크에서 건축을 공부하고 1909년 프란츠 호프만과 함께 건축설계사무실에서 일했다. 후에 동생 막스 브루노가 합세했으며 특히 신즉물주의적인 오피스빌딩 설계로 알려졌다. ♣

목차

생애

학업과 건축설계사무실

브루노 타우트는 당시 동프러이센에 속했던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상인 집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897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건축전문학교에서 삼학기 만에 수료했다. 1902년 함부르크의 프리츠 노이게바우어 건축설계사무소, 비스바덴의 프란츠 파부리 건축설계사무소 등에서 일년 덩도 일하다가 베를린의 건축가 브루노 뫼링 Bruno Möhring을 통해 아르누보 양식과 유리와 철골로 설계하는 새로운 양식에 접하게 되었다. 1904-1908 슈투트가르트의 테오도르 피셔와 함께 일하면서 도시설계의 원칙을 배울 수 있었다. 피셔의 중개로 1906년 루드비히스부르크의 마을 교회 개축설계 용역을 받았다. 타우트가 처음으로 혼자 실시한 프로젝트였다. 예술사와 도시계획을 공부하기 위해 1908년 베를린으로 이주한다. 일년 후 프란츠 호프만과 함께 베를린에 건축설계사무소를 연다. 1914년 부터 주상복합, 오피스건물, 성당 개축 등의 프로젝트를 실시한다.

초기 대작들

1913년부터 동생 막스 타우트가 합세하면서 큰 작품들을 설계하기 시작했다. 베를린과 막데부르크에서 다수의 전원주택단지들 설계를 의뢰해 왔다. 전원주택단지는 영국에서 출발하여 독일에 전파된 새로운 주거개념이었다. 타우트는 전원주택단지에 신건축양식을 시도했다. 이때 개발한 일련의 디자인 원칙은 향후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며 독일에 신건축 개념을 불러일으켰다. 근로자층을 위해 설계된 전원주택단지들이었다. 타우트는 우선 도로를  남북방향으로 도로를 내어 주택에 일조관계와 통풍조건을 유리하게 했다. 신건축양식의 단조로움에 변화를 주기 위해 원색을 적용한 입면 색채컨셉을 도입한 것은 타우트만의 특징이 되었다. 예를 들어 베를린의 팔켄베르크 단지는 “물감통”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된다.

막데부르크 시의 남서부 약 삼천 헥타르의 땅에 1909년 “리폼Reform”이라는 이름으로 가든시티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타우트와 호프만 건축설계사무실에서 1912년부터 의뢰를 받아 여러 개소의 “물감통” 단지를 설계했으며 이로 인해 건축계에서 명성을 얻게된다.

베를린 팔켄베르크의 "물감통" 전원주택단지. 브루노 타우트 1913년 작

베를린 팔켄베르크의 “물감통” 전원주택단지. 브루노 타우트 1913년 작

1914년 쾰른에서 개최된 독일공작연합 건축전시회에 타우트는 유리제조업체를 위해 유리 파빌리온을  만들어 세웟다. 이로 인해 타우트는 국제적 명성을 얻게 된다. 곧 발발한 일차대전 중 타우트는 이론 연구에 몰두한다. 그의 동료가 참전했으나 타우트는 참전을 거부했다. 그 대신 화약공장 건설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것으로 병역의무를 대신했다. 1917년 반전성명서를 발표하고 평화기념물을 설계했다. 이 기간동안 연구한 이론을 토대로 하여 1918과 1919 사이에 “건축과 자연의 융합”이라는 테마로 여러 점의 스케치를 발표한다. 이때 그의 유명한 알프스 건축과 도시의 해체라는 그림 시리즈가 탄생했다. 영국의 에버네저 하워드의 가든시티 이론에 영감을 받은 “도시의 해체”는 그를 도시이론가의 반열에 서게 했다. 일차대전 이후 번져 간 혁명의 소용돌이에 깊은 인상을 받은 타우트는 “예술 노동자 회의”를 결성하여 독일의 11월 혁명의 이념을 예술 분야에도 접목시키고자 했다. 그는 또한 “유리 목걸이”라는 이름으로 커뮤니케이션 조직을 만들었다. 발터 그로피우스, 한스 샤룬 등 당대 중요한 건축가 들 상당수가 이에 동참했다. 유리목걸이의 회원들은 각자 ID를 만들어  편지를 써서 건축의 미래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 지금으로 말하면 페이스북 비밀 그룹과 흡사했을 것이다. 이 시기에 타우트는 설계의뢰가 없었으므로 무대장치 들을 만들어주며 연명했다.

브루노 타우트가 1914년 공작연맹 쾰른 건축전시회장에 세웠던 유리 파빌리온

브루노 타우트가 1914년 공작연맹 쾰른 건축전시회장에 세웠던 유리 파빌리온

막데부르크 시절

전후에는 복구 및 도시재생의 과제가 시급해졌다. 이때 막데부르크의 시장으로 선출된 사회민주당의 헤르만 바임스는 리폼 전원도시를 설계했던 “아방가르드하고 창의적인” 브루노 타우트를 기억해 내고 도시건설국장으로 초빙했다. 그의 우선 과제는 막데부르크 시의 종합주거계획을 수립하는 것이었다. 타우트가 수립한 종합주거계획은 그 후 수세기 동안 막데부르크 도시건설에 영향을 미쳤다. 종합계획을 수립하는 한편 타우트는 건축 색체 컨셉을 끝까지 밀어부쳤다. 부임한 해에 바로 언론을 통해 “색에 대한 용기를!”이라는 캠페인을 벌였다. 1922년 중부독일 막데부르크 박람회가 개최되는 시점까지 도심의 공동주택 80동이 타우트의 디자인에 따라 오색 옷을 입게 되었다. 일부 시민들이 극심한 반대에 부딪치기도 했으나 결국 타우트의 색채컨셉은 도시를 홍보하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한 동안 막데부르크는 “오색의 도시”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독일 전역의 언론에서 호평을 받았다. 박람회를 위해 타우트는 “도시와 전원”이라는 제목으로 전시관을 디자인하여 1922년 준공되었다.

막데부르크 리폼전원도시 현재 모습 photo: Eddy 1988 via Wikimedia Commons

막데부르크 리폼전원도시 현재 모습 photo: Eddy 1988 via Wikimedia Commons

다시 베를린으로

종합주거계획이 완성된 후 타우트는 막데부르크에 머물지 않고 1924년 사임하고 다시 베를린으로 돌아간다. 여기서 다시 동생 막스와 호프만과 합류하여 1931년까지 다수의 주거단지 프로젝트를 구현했다. 이 때 쉴러파크, 말굽단지, 자유로운 고향, 칼 레기엔 단지, 톰아저씨 오두막 등이 탄생하며 이들은 후에 모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8년 동안 타우트와 호프만은 총 만 이천 구의 주택을 지은 셈이다.

1928년에는 교육개혁자 프리츠 카르센과 함께 전인교육을 위한 종합학교의 컨셉을 개발했다. 담길학교라고 불리는 이  학교를 설계하며 타우트는 개혁적인 교육이념을 건축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보수진영의 극심한 반대에 겹쳐 1929/39년의 경제공황이 왔으므로 프로젝트는 구현되지 못했다. 다만 타우트가 세운 모델건물이 남아있다. 1998-2001 사이에 복원되었다. 후에 프리츠 카르센은 콜롬비아로 망명을 가게 되는데 함께 망명간 건축가들과 함께 베를린에서 시도했던 컨셉을 응용하여 보고타에 대학도시의 형태로 구현하게 된다.

1930년 베를린 공과대학 도시와 단지학 겸임교수로 임명된다. 이때 보수적인 교수들 사이에서 타우트의 임명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드높았다. 타우트는 단지설계 세미나에서 처음으로 그룹 작업 시스템을 도입한다. 곧 이어 프러이센 예술아카데미 회원으로 추대되었으며 일본의 국제건축가협회에서도 타우트를 명예회원으로 초빙했다.  타우트는 혁명이념이 소련에서 성취된 것으로 여기고 1932년 모스크바의 초대에 응해 모스크바 시의 도시계획부 설립을 돕는다. 그러나 곧 소련의 건축, 경제 및 기술적 상황에 큰 실망을 느끼고  베를린으로 되돌아 간다.

나치 시대

베를린의 “말굽단지”. 타우트가 1925년에 설계했으며 현재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Photo:  Sebastian Trommer, Wikimedia Commons, CC BY-SA 3.0

그러나 베를린에서는 이미 그의 생활 기반이 사라진 상태였다. 정권을 잡은 나치는 타우트를 “문화볼세비키”로 낙인찍고 교수직과 예술아카데미 회원 자격을 박탈했다. 타우트는 불과 2주 만에 다시 베를린을 떠나야 했다.

잠시 스위스에 머물었다가 일본 건축가 이사부로 우에노의 초대를 받아 일본으로 건너간다. 그러나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설계의뢰가 단 한 건에서 그치고 만다. 동경 남쪽의 해안에 아타미라는 휴양도시에 있는 한 상인의 빌라를 개축하는 일이었다. 타우트는 일본 친구 건축가와 함께 작업을 마친다. 이 건물은 2011년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관광명소가 되었다. 1933년에서 1936년 사이에 다시 일이 없어졌으므로 “신건축양식”에 대한 이론을 정리하여 발표한다. 손수 디자인한 공예품을 팔아 연명한다.

1036년 터키에서 부름을 받는다. 이스탄불의 예술 아카데미의 건축학 교수로 초청되었으며 터키의 현대화 작업에 동참해 달라는 의뢰를 받는다. 이때 베를린에서부터 알고 지내던 건축가 마틴 바그너가 이미 터키에 이주해 있었으므로 그의 도움을 받아 이주를 결심한다. 이스탄불 예술대학 학장이 되어 강의하는 한편 앙카라 대학 건물 등 설계 작업을 다시 시작한다. 또한 교육부의 건설국장으로 부름을 받아 학교를 여러 개 세우게 된다. 1938년 일본에서 집필했던 “건축학 이론”이 터키어로 출간된다. 같은 해에 터기 예술 아카데미에서 타우트 전작 전시회를 개최한다. 몇 해전부터 천식을 앓던 타우트는 결국 발작을 이기지 못하고 1938년 12월 24일 향년 58세로 이스탄불에서 숨을 거둔다. 그의 유해는 외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국립현충묘지에 묻힌다.

이스탄불 대학의 철학과 건물. 타우트가 1937년에 설계했다. photo: Avniyazici via Wikimedia Commons

이스탄불 대학의 철학과 건물. 타우트가 1937년에 설계했다. photo: Avniyazici via Wikimedia Commons

작품

  • 1913 베를린 팔켄베르크 전원주택단지 Gartenstadt Falkenberg
  • 1913 막데부르크 주거단지 “리폼 Reform“
  • 19194 쾰른 독일공작연합 전시회 유리 파빌리온 (파괴 됨)
  • 1915-1920 북 슐레지엔 카토비츠 호헨로에 공장 근로자 주택단지
  • 1922 막데부그크 전시장 “도시와 전원” (현재 헤르만 기젤러 홀)
  • 1924-1932 베를린 테겔 구의 공익 주택조합 “자유의 집”
  • 1924-1930 베를린 베딩 구 주거닺니 쉴러 파크
  • 1925 베를린 브리츠 구의 “말굽 단지 Hufeisensiedlung“
  • 1926 베를린 첼렌도르프 구 주거단지 “톰 아저씨 오두막  Onkel Toms Hütte“
  • 1925-1926 베를린 트리어 슈트라쎄 공동주택
  • 1925-1929 베를린 부슈알레 타우트 단지 Taut-Siedlung, Buschallee, 13088 Berlin
  • 1929 베를린 프렌츠라우어베르크 주거단지 “칼 레기엔”,  Grellstraße Wohnstadt „Carl Legien“
  • 1930 베를린 미테구 독일 교통연합 건물 (1930년 동생 막스 타우트가 완성)
  • 1928 베를린 노이쾰른, 오싸슈트라쎄 주택단지
  • 1928-1932 베를린 베딩 프리드리히 에버트 단지
  • 1932 젠프텐베르크 발터 라테나우 김나지움 (현재 초등학교)
  • 1937 앙카라 대학

브루노 타우트의 말굽 단지 주택 출입문 디자인 모음. ©BenBuschfeld via Wikimedia Commons

브루노 타우트의 말굽 단지 주택 출입문 디자인 모음. © BenBuschfeld, Wikimedia Commons, CC BY 3.0

베를린 베딩 구의 주거단지 "쉴러파크" 1924-1930. photo: Marbot via Wikimedia Commons

베를린 베딩 구의 주거단지 “쉴러파크” 1924-1930. Photo: Marbot. Wikimedia Commons. CC BY-SA 3.0 de

베를린 첼렌도르프의 "톰 아저씨 오두막" 단지. L. de Lang via Wikipedia Commons

베를린 첼렌도르프의 “톰 아저씨 오두막” 단지. Photo: Gyxmz, Wikipedia Commons. CC BY-SA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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