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우하우스 Bauha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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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하우스 로고. 1922년 오스카 슐렘머Oskar Schlemmer가 디자인했다. © public domain/Lucano

바우하우스는 1919년 발터 그로피우스 Walter Gropius 가 바이마르Weimar에 설립한 종합예술학교를 말한다. 그로피우스를 위시하여 하네스 마이어, 루드비히 미스 판 데어 로에 등 역대 교장이 모두 건축가였으므로 일반적으로 건축대학으로 간주되고 있으나 <건축을 구심점으로 삼은 종합예술>을 추구했다. <바우하우스>라는 명칭은 <짓기> 또는 <지은 것>이라는 뜻의 <바우Bau>와 집을 뜻하는 <하우스Haus>의 합성어다. 그러나 집을 짓는다는 뜻이 아니라 <짓는 곳>이라 해석해야 한다.  집만 짓고자 한 것이 아니라 모든 예술과 공예 분야를 <짓는 행위>로 파악했기 때문이다.

학교의 유형, 교육 내용과 방식도 당시로서는 전혀 새로운 것이었다. 예술과 공예를 결합시킨다는 취지 하에 설립되었으며 20세기 모더니즘의 흐름을 결정했고 건축, 예술과 디자인 뿐 아니라 문화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933년, 설립 후 불과 14년 만에 나치스 정권에 의해 강제 폐교되었으나 고전 모더니즘 아방가르드의 표상으로서 자유로운 응용예술의 산실로 지금까지도 그 영향력을 잃지 않았다.

목차

개요


기존의 바이마르 왕립 작센 예술학교와 1907년 앙리 반 데 벨데가 설립한 예술공예학교의 합성으로 탄생했다. 초기에는 반 데 벨데가 디자인한 예술공예학교 건물에서 시작했다. 1925년 데싸우로 이전하고 1926년 새로운 건물을 지었다.

바우하우스의 영향이 너무 크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모더니즘의 건축 및 디자인과 동일시되는 경향이 있다. 바우하우스라는 개념 자체를 특정한 건축 양식, 가구 디자인 스타일에 적용하는 것은 예술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정확한 것이 아니다. 바우하우스라는 학교에서 마이스터와 학생들이 공동 작업을 통해 이룩한 성과는 국제적인 긴 흐름의 일부로 이해되어야 하며 기능주의, 고전 모더니즘, 신 즉물주의, 국제스타일, 신 건축양식 등과 같은 여러 개념의 반열에 끼워 넣는 것이 옳을 것이다.

바우하우스에서는 순수예술, 응용예술 및 공연예술 등 대개 서로 분리된 분야들을 서로 통합했으며 이는 다시금 회화, 공연예술과 음악에 영향을 미쳤다.

기본이념


앙리 반 데 벨데와 발터 그로피우스는 예술이 산업화되어 가는 것을 막고 공예의 전통을 부활시키는데 뜻을 두었다. 이는 당시 예술계를 지배했던 역사주의에 반기를 드는 것이기도 했다. 공예 디자인이 공장에서 대량상품으로 복제되어 나오는 것에 저항한 것이다. 당시의 예술 개념은 아방가르드의 순수예술만 의미하지 않았다. 전통적 생산방식, 즉 수공업으로 제작된 제품에 아름다움을 더하는 것 역시 예술의 범주에 포함시켰다.  전통적인 수작업에 의존하면서 시대에 맞게 산업생산을 인정하고 여기에 아름다운 형태를 찾아 주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바우하우스의 모토는 <건축은 종합예술이므로 다른 예술분야를 집합시켜야 한다.> 였다. 그로피우스는 1919년 학교 설립을 기해 선언문을 집필, 모든 작업의 최종 목표는 <짓는 것>임을 표방했다. 즉, 이론이나 설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제품, 혹은 작품이 나와주어야 했다. 그로피우스 개념에 따르면 건축가, 조각가, 화가 모두 우선 장인이어야 했다. 그러므로 바우하우스의 교수들은 교수라 불리지 않고 마이스터라 불렸다. 건축도 타 제품처럼 모듈을 개발하여 산업건축 뿐 아니라 주택에도 적용, 위성도시나 메가시티 등에 저렴한 주택을 공급하는 방식이 고안되었다. 특기할 것은 예술공예 각 분야간의 경계도 허물어 누구나 건축, 목공, 금속공예, 사진, 직조, 무대미술 등을 섭렵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이런 총체적holistic 개념을 대입하여 한 분야의 장인정신을 고수해 왔던 전통적 사고방식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다.

발터 그로피우스는 바우하우스를 일종의 워킹그룹으로 이해했고 예술가와 장인 사이의 경계가 사라졌다. 기본적인 방향이나 결과를 놓고 볼 때 1907년에 설립된 독일공작연합과 흡사한 점이 많다. 앙리 반 데 벨데와 발터 그로피우스 모두 독일공작연합의 창립멤버였다.

창조적 행위를 통해 바우하우스 일원들 사이의 사회적 격차를 제거하고 타 문화 간의 교류와 이해를 도모하고자 했다. 처음부터 국제학교로서 유럽 타국가는 물론 미국과 일본 학생도 공부했으며 무엇보다도 남녀평등사상을 원칙으로 삼아 여학생의 비율이 매우 높았다. 한 기의 정원이 대략 160명이었는데 14년 동안 바우하우스에서 공부한 여학생이 500명을 넘었다.

 

역사


비록 14년 짧은 역사였지만 장소를 두 번 이전한 까닭에 바이마르 시대(출발) – 데싸우 시대(전성기) –  베를린 시대(종말)로 나뉜다. 

전신

바우하우스의 역사는 앙리 반 데 벨데가 1902년에 바이마르에 개설한 <공예세미나>로부터 시작된다. 공예세미나가 1907년 공예학교로 발전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반 데 벨데가 후일 바우하우스에서 유명해지게 되는 기법과 원칙들의 큰 부분을 정립했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Bauhaus University Weimar_Ralf Hermann

1904-1911 앙리 반 데 벨데의 설계에 따라 세워진 공예학교의 아틀리에 건물. 1996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현재 바우하우스 대학에서 본관으로 쓰고 있다. © CC BY-SA 2.0/Ralf Hermann

1919-1925: 바이마르

1919년 4월 12일 바우하우스가 정식으로 발족되었다. 정식 명칭은 <국립 바우하우스>로서 국립예술대학에 맞먹는다고 볼 수 있다. 독일 정부에서 세운 것은 아니지만 당시 작센 바이마르를 통치했던 대공이 인가한 것이므로 국립으로 불렸다. 앙리 반 데 벨데가 물러나며 새로운 학교의 책임자로 발터 그로피우스를 추전했고 그로피우스가 학교의 명칭을 <바우하우스>라 정했다.

그로피우스는 라이오넬 화이닝거Lyonel Feininger, 요하네스 이튼Johannes Itten, 요셉 알베르스Josef Albers, 파울 클레Paul Klee (1921년 부터),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922년부터), 오스카 슐렘머Oskar Schlemmer  (1921년부터) 등 쟁쟁한 예술가들을 교사로 섭외했다. 건축학과는 1920년 비로소 아돌프 마이어 Adolph Meyer가 부임하면서 비로소 개설되었다. 그럼에도 체계적 건축학과 교육은 실시하지 않았다.

1923년 요하네스 이튼이 사임하고[1]그로피우스와의 의견 차이로 사임하고 스위스의 신 … Continue reading 헝가리 출신의 구조주의 예술가 라슬로 모홀리 나지László Moholy-Nagy 가 후임으로 왔다. 이튼은 전인교육을 주창했으며 전교생들이 참여해야 했던 교양과정을 이끌었었다. 예술교육의 교양과정은 바우하우스에서 처음으로 시도 되었으며 향후 전 세계 대학에서 모방되었다. 교양과정을 통해 모든 분야를 아우르는 전인적인 교육을 추구했다.

수업은 이론과 공방실습으로 구분되었다. 공방은 <형태의 장인(예술가들)>과 <기술 장인>들이 이끌었다. 초기에는 산업시대 이전의 수공업에 대한 낭만적인 동경과 현대적 감각이 혼합되었었다. 초기 교사와 학생의 공동 프로젝트였던 좀머펠트 하우스 Haus Sommerfeld등을 보면 아직 표현주의적 경향이 남아있음을 알 수 있다.

Bauhaus University Weimar Lobby_Hans Weingartz

바이마르 바우하우스 대학 본관 로비의 아르누보 스타일의 계단. 로댕의 작품 “이브”가 서 있다. © CC BY-SA 2.0/Hans Weingartz.

제1회 바우하우스 전시회와 바우하우스 주간

설립 4주년을 맞아 1923년 제1회 바우하우스 전시회 등 기념행사가 열렸다. 그로피우스는 아직 시기상조로 여겼으나 튀링겐 의회에서 그동안의 성과를 내보이라는 압력을 가해 왔다. 이에 그로피우스를 위시한 마이스터들과 학생들이 총력을 기울여 전설적인 <바우하우스 주간>을 창조해 냈다. 학교의 취지에 부합되게 종합 예술 프로그램으로 구성되었으며 기술과 접목된 새로운 예술경향에 대한 그로피우스의 기조 연설을 선두로 일주일간 바이마르 시내 곳곳에서 강연회, 음악회, 무대공연 등이 개최되었다. 이때 오스카 슐렘머가 미술을 무용극으로 재해석한 <삼인무>가 공연되었으며 부소니의 피아노 콘서트, 힌데미트의 마이라의 노래 등 후일 명곡으로 역사에 남게 될 음악들이  초연되었다.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나 바우하우스는 무대 예술을 특히 중요시 여겨 예술과 기계의 접목을 실험하는 장소로 활발히 이용했다.

바우하우스 주간 마지막 날에는 스트라빈스키의 음악극  <병사들 이야기>가 공연되었고 히르시펠트의 빛을 이용한 극, 등불축제, 폭죽놀이, 춤 등으로 마무리했다. 동시에 바이마르 국립바우하우스 1919-1923이라는 책자를 독일어, 영어, 러시아어로 출판하여 배포했다.

또한 모델하우스를 지어 전시했는데 1923년 바이마르  “암 호른 Am Horn”에 완성된 이 모델하우스는 신 즉물주의 개념으로 지어진 최초의 건물로서 네덜란드에서 시작된 더 스테일 De Stijl 의 영향이 녹아들었다. 그러나 대중들은 신즉물주의적 건축을 차갑고 메마른 기계적 건물로 느껴 거부반응을 보였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에 바우하우스 일원들과 이에 동조하는 그룹은 좌파, 국제파 등으로 불렸으며 정치적 우파들은 바우하우스를 처음부터 거부했다. 1924년 튀링겐 주의 선거에서 우익이 정권을 잡자 바우하우스의 예산을 반으로 삭감했다. 그러자 뮌헨, 쾰른 등 다른 도시에서 러브콜을 보내왔다. 당시 쾰른의 시장이었던 콘라드 아데나워도 그 중 하나였다. 정치적 경제적 압력을 받은 바우하우스는 1925년 데싸우로의 이전을 결정했다. 항공기 제조사의 후고 융커스Hugo Junkers 사장이 재정지원을 약속하기도 했지만 당시 데싸우는 사회민주적이고 관대한 분위기의 안정적 산업도시였다. 건축학과 교수 아돌프 마이어 등은 데싸우로 이전하는 것에 반대하여 바우하우스를 떠나 프랑크푸르트로 갔다. 당시 프랑크푸르트에도 진보적인 예술학교가 설립되었기 때문이었다.

House am Horn Weimar 1923_Most Curious

바우하우스 최초의 모델하우스. 바이마르의 암 호른에 위치하고 있다. 학생과 마이스터들의 공동작품으로 건축으로 부터 실내장식, 가구와 생활용품 일체를 직접 디자인하고 제작했다. ©CC BY-SA 3.0/ Most Curios.

1925-1932: 데싸우 Dessau

데싸우 시절의 바우하우스를 전성기로 보고 있다. 이때 비로소 산업계와의 협업이 시작되어 마르셀 브로이어Marcel Breuer, 마트 스탐Mart Stam, 미스 판 데어 로에Mies van der Rohe 등이 디자인한 철제 흔들의자가 제작되기도 했다.

1926년 12월 4일 발터 그로피우스가 디자인한 바우하우스 건물이 준공되었다. 도로쪽으로 면한 서쪽 날개건물은 외피가 완전히 유리로 이루어져 큰 인상을 남겼다. 역시 그로피우스가 설계한 <마이스터하우스 Meisterhaus>도 동시에 준공되었다. 마이스터 하우스는 교수 사택으로서 주거와 작업이 공존한다는 콘셉트를 일관되게 구현했다.

1928년 4월 1일 그로피우스가 퇴임하며 스위스 출신의 건축가 하네스 마이어Hannes Meyer를 후임으로 추천했다. 하네스 마이어는 <사치품보다는 대중의 욕구를 만족시켜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사회주의 건축가로 알려졌다. 그는 산업계와의 협업에 박차를 가했으며 건축학과에 포커스를 맞추었다. 이 시절, 베를린 북부에 전국 노조연맹ADGB을 위한 대형 연수원을 설계하고 학생들의 참여 하에 직접 시공했다.[2]이 ADGB 연수원은 현재 말끔히 복원되었으며 유네스코 … Continue reading 1930년, 우익 경향의 데싸우 시장이 좌파 사회주의자였던 하네스 마이어를 해임했고 그 후임으로 루드비히 미스 판 데어 로에가 부임했다. 그러나 1931년 선거에서 나치당이 데싸우의 지방정권을 넘겨받았고 이듬해 1932년 눈에 가시같던 바우하우스의 폐교를 결정했다. 미스 판 데어 로에는 학교를 베를린으로 옮겨 사립학교로 운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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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싸우의 바우하우스 건물. 발터 그로피우스가 설계하고 1926년 준공되었으며 최근에 복원되었다. © CC BY-SA 3.0/ Lelikr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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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싸우의 마이스터하우스 중 하나. 칸딘스키와 클레가 살던 집이다. © CC BY-SA 3.0/harald909.

1932-1933: 베를린

1932년 베를린 서남쪽으로 이주하여 사설학원의 형태로 운영하였으나 나치스 정부에서 수시로 건물을 수색하고 학생들을 검거하여 결국 1933년 해체되고 말았다. 이후 많은 바우하우스 교수들과 학생들이 망명길에 올랐으며 이로 인해 바우하우스 이념이 오히려 전 세계에 전파되는 결과를 빚었다.

학과 구성


바우하우스 수업은 세 과정으로 나뉘었었다. 우선 한 학기 동안 교양과정을 통해 형태와 재료를 실습했다. 그 다음 단계는 공방과정이며 마지막 단계가 건축수업이었다.  이 과정에서는 건축현장에서 직접 일 해야 했다. 기간은 여건에 따라서 달랐으며 세 과정을 모두 수료하면  수공업회의소에서 장인 자격증을 부여받았다. 특별히 재능을 인정받으면 바우하우스 졸업장을 받는다. 졸업장을 받으면 바우하우스에서 장인으로 학생들을 지도할 수 있었다.

공방과정

공방과정은 물론 각 공방에서 직접 진행되었다. 재료를 철저히 익히고 제품제작, 디자인의 중요한 원칙을 배웠다. 일반 대학처럼 강의를 통해 이론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가들과 직접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배우게 되는 것으로 중세의 장인과 도제제도의 원칙을 적용했다. 교수라는 호칭이 없었으며 그 대신 형태장인, 폼마이스터라고 불렀다. 폼마이스터에게는 각각 공예 마이스터가 파트너로 주어져 기술을 가르쳤다. 아래와 같은 공방들이 운영되었다.

  1. 인쇄 : 라이오넬 화이닝거Lyonel Feininger
  2. 스테인드 글라스 : 요세프 알베르스 Josef Albers / 요하네스 이튼Johannes Itten
  3. 금속 공예 : 요하네스 이튼Johannes Itten ⇒ 라슬로 모홀리-나지László Moholy-Nagy
  4. 가구제작 :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
  5. 직조 : 게오르그 무헤Georg Muche
  6. 사진 : 발터 페터한스Walter Peterhans
  7. 벽화 : 오스카 슐렘머Oskar Schlemmer /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 알프레드 아른트Alfred Arndt
  8. 무대장치 : 로타르 슈라이어Lothar Schreyer ⇒ 오스카 슐렘머Oskar Schlemmer
  9. 도서디자인 및 제본 : 파울 클레Paul Klee
  10. 도자기 : 게르하르트 마르크스Gerhard Marcks
  11. 건축 :발터 그로피우스 Walter Gropius ⇒ 한네스 마이어Hannes Meyer ⇒ 루드비히 미스 판 데어 로에Ludwig Mies van der Rohe,
  12. 전시디자인 : Joost Schmidt
  13. 하모니 수업 : Gertrud Grunow

 

바우하우스 무대


바우하우스를 특별하게 만든 요소 중 하나는 실험무대였다. 처음부터 강연회 등을 위해 무대가 필요하기도 했지만 그로피우스는 무대와 건축 사이의 유사성을 발견하고 무대예술의 작업 방식을 제대로 연구하기 위해 무대공방을 설치했다. 무대장치가면서 <폭풍 무대>에서 표현주의 드라마를 만들던 로타르 슈라이어Lothar Schreyer로 첫 마이스터로 부임했다. 그의 수업 중에 학생들은 무대 위에서 자신을 폭풍처럼 강렬하게 표현해야 했다.  이 무대 수업은 전교생이 참가해야 하는 교양과정에 속했다.

1923년 오스카 슐렘머가 무대마이스터로 부임하면서 무대수업의 성격이 완전히 바뀌며 일대 혁신이 왔다.  폭풍처럼 자신을 표현하는 감성의 무대가 아니라 기술과 인체 및 공간과의 관계를 실험하는 과학 무대로 돌변한 것이다. 화가, 조형예술가였던 오스카 슐렘머는 이미 1916년 슈투트가르트에서 삼인무Triadic ballet[3]1968년에 복원하여 만든 비디오 영상을 유튜브에서 볼 수 있다.를 고안하여 무대에 올린 뒤 미술과 기술과의 관계, 무기적 형태와 인체와의 관계, 동작이 만들어 내는 공간 등을 연구하고 실험하는 장소로서 무대를 적극 활용했다. 이 시기에 바우하우스 무대는 전국적으로 명성을 얻었을 뿐 아니라 연극계 전반에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하기에 이른다.

바우하우스 무대에서 탐구하고자 했던 것은 <새로운 인간>이었다. 모더니즘을 사는 인간들은 어떤 유형인가. 기술적 환경에 지배되는 인간들인가? 인간이 기계적, 수학적, 과학적 기준에 따라 날로 새롭게 정의되던 시기였다. 그렇다면 인간의 영혼과 감성과 정신과  육체는 과연 무엇인가? 인간의 창의성과 감각, 생산성과 삶의 에너지가 기계와 도구를 통해 증가되는가?

오스카 슐렘머의 수업시간에 학생들은 종이, 목재, 와이어, 유리 등의 다양한 소재로 기하학 형태의 의상과 가면, 모자 등을 직접 만들어 입고 무대 위에서 춤을 추어야 했다. 이때 재료와 형태에 따른 인체의 움직임을 각각 분석하고 인체의 반응과 느낌을 연구했다.

바우하우스가 페교되고 이차 대전이 발발하고 전후 국토재건 등의 과제에 몰입하는 동안 잊혔던 바우하우스 무대가 1970년대 재발견되며 다시 흥미로운 연구 대상이 되었다. 춤, 연극, 음악, 퍼포먼스 프로젝트 등을 통해 당시의 상황이 복원되거나 재현되었다. 1997년 이후 바우하우스의 무대는 제자리로 돌아 와 다시 실험실이 되었으며 배우와 무용가, 음악가와 화가 등 모든 장르의 예술가들이 합동 프로젝트를 여는 곳이 되었다.

1927년 삼인무Triadic Ballet 공연을 마치고. 드물게 존재하는 사진. ©Bauhaus.de/Ernst Schneider

바우하우스와 사진


1923년 4주년 전시회를 기해 카탈로그 등을 만들면서 사진의 중요성이 부쩍 대두했다. 모홀리-나지의 부인 루치아가 사진 작가로서 바우하우스에서 만든 제품과 건축을 모두 사진에 담아 매우 중요한 유산으로 남게 되었다. 그녀의 제안으로  1929년 뒤늦게나마 사진반이 개설되었으며 마이스터들과 학생들도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바우하우스의 사진은 예술 작품으로서 새로운 것을 시도할 목적이 아니라 디자인 제품을 정확하고 즉물적으로 담아 내는 한편 바우하우스의 일상, 바우하우스의 인물들을 기록한다는 데 더 큰 의의를 두었다. 여기서 사물을 새롭게 보는 방법Neues Sehen이라는 개념이 파생되어 나왔다.[4]1929-1933년 사이에 수많은 흑백사진이 나왔으나 모두 저작권에 … Continue reading

 

바우하우스의 영향


나치스를 피해 이스라엘로 건너간 바우하우스 출신의 유대인 건축가들이 텔아비브 신도시에 4천 여구의 건축을 세웠다. 아무 장식없는 백색 건축으로 이루어졌으므로 <백색의 도시>로 불렸다. 2000년 바우하우스 센터 오픈, 200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2008년 바우하우스 박물관 오픈, 2009년 낙후된 건물들을 별도로 문화재로 지정 복원하는 등 델아비브에 제2의 바우하우스가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텔아비브 백색도시 광장. 1938년 사진. © public domain

발터 그로피우스, 요세프 알베르스, 라슬로 모홀리-나지, 루드비히 미스 판 데어 로에 등은 미국으로 망명길을 떠났다. 미스 판 데어 로에는 북 캐롤라이나 주의 블랙 마운틴 컬리지를 중심으로 실무에 입각한 바우하우스 이념으로 디자인 교육을 개편했다. 건축 뿐 아니라 제품 디자인,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에도 바우하우스 개념이 빠른 속도로 디자인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라슬로 모홀리-나지는 1937년 시카고에 뉴 바우하우스를 설립하여 이끌었다. 본래 그로피우스가 학장이 될 예정이었으나 하바드의 디자인 대학원의 교수로 부름을 받았기에 모홀리 나지가 대신했다.

2차 대전 이후 1953년 남독의 울름에 디자인 대학이 설립되어 바우하우스 출신의 막스 빌 Max Bill이 이끌었다. 바우하우스 콘셉트를 바탕으로 스위스 타이포그래피의 영향을 받아 그래픽을 도입했으며 순수 예술은 의도적으로 예술은 배제했다.

다름슈타트 Darmstadt의 미술관 Kunsthalle에서 1960년 바우하우스 전시회가 개최되었다. 여기서 발전하여 다름슈타트에 바우하우스 아카이브가 설치되어 바우하우스의 제품과 도서, 문헌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규모가 커지자 별도의 건물을 짓기로 결정, 발터 그로피우스에게 설계를 의뢰했으나 정치적 문제로 적당한 필지 구입이 어려워 계획이 무산되었다. 당시 팔순의 노령이었으나 아직 활동을 멈추지 않았던 그로피우스는 보스톤에서 건너 와 베를린을 자주 찾았고 베를린의 건설국장을 설득하여 결국 바우하우스 아카이브는 베를린에 설립되었다.

1970년대 초 바우하우스 스타일로 제작된 가구, 램프, 커피세트 등의 일상용품들이 시장에 나타나면서 바우하우스의 통일된 디자인 윤곽이 확실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가구와 일상 제품들은 대중들 사이에서도 바우하우스 디자인이 하나의 개념으로 자리잡는데 일조했다. 일체 색상을 배제하고 흑백이나 크롬 색을 적용한 것이 특징이다.

1986년 데싸우 바우하우스 건물이 동독의 디자인 본부로 이용되었다가 통일 후  1994년 바우하우스 데싸우 재단이 설립되었으며 지금까지 본부로  쓰고 있다. 1996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바우하우스의 유산과 문헌들은 베를린에 위치한 <바우하우스 아카이브>와 바이마르의 <바우하우스 박물관>에서 주로 보관, 전시하고 있다.

베를린에 위치한 바우하우스 아카이브. 뿔뿔이 흩어졌던 바우하우스 유산과 문헌들을 수집 보관하고 전시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 Jeong-Hi Go

 

참고문헌


  • Droste, Magdalena; Bauhaus-Archiv (1990): Bauhaus. 1919-1933. Koln: Taschen.
  • Edelmann, Thomas (2009): “Das Kreativlabor der Moderne”. in: Deutschland.de https://www.deutschland.de/de/topic/leben/lifestyle-kulinarik/das-kreativlabor-der-moder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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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각주
1 그로피우스와의 의견 차이로 사임하고 스위스의 신 조로아스터 교단에 합류. 후일 사립예술학교를 설립했다.
2 이 ADGB 연수원은 현재 말끔히 복원되었으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3 1968년에 복원하여 만든 비디오 영상을 유튜브에서 볼 수 있다.
4 1929-1933년 사이에 수많은 흑백사진이 나왔으나 모두 저작권에 묶여 있다. 바우하우스 아카이브 사이트에서 온라인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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