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실리오 피치노 Marsilio Ficino (1433 – 1499)
[box style=”1″][dropcap style=”default, circle, box, book”]마[/dropcap]르실리오 피치노는 이태리 의사, 인문주의자, 철학자이다. 15세기 피렌체 인문주의자 중 대표적인 인물에 속한다. 플라톤의 작품을 라틴어로 번역하고 주석을 붙여 플라톤의 사상을 널리 알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의 덕으로 그리스어는 모르나 라틴어에 익숙한 계층이 그리스 철학에 접근할 수 있었다. 신플라톤 파로서 초기 르네상스 시대에 플라톤을 재해석하는 데 방향을 제시했다. 그가피렌체의 플라톤 아카데미를 이끌었다는 해석이 있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당시에 플라톤 아카데미라는 시설이 실존했던 것이 아니고 그의 제자들로 구성된 모임에 불과했다. [/box]
목차
성장과정
피렌체 인근의 Figline라는 마을에서 태어났으나 그의 아버지가 코시모 데 메디치의 주치의였으므로 피렌체에서 성장했다. 피치노에 따르면 코시모가 60세 가까이 되었을 때 피렌체에서 개최되었던 공의회에서 비잔틴 학자 게미스토스 플레톤Georgios Gemistos Plethon 을만나 플라톤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코시모는 아테네 플라톤 아카데미의 본을 따라 피렌체에 아카데미를 설립하고자 했다. 당시 피치노는 여섯 살의 소년이었음에도 코시모는 그의 잠재력을 보고 후에 플라통 아카데미를 이끌 인재로 점찍었으며 그에 따른 교육을 받게 했다. 피치노 자신의 발언이므로 다소 과장되었을 수도 있으나 그 시대에 젊은이들이 플라톤 사상을 일찍 접했음을 알게한다. 피치노 자신의 발언에 의하면 그는 어린 시절부터 “플라톤의 하늘같이 신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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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치노는 피렌체 대학에서 모두 일곱 분야로 구성된 소위 “자유학과 artes lieberales”와 의학을 전공했다. 이때 이미 스콜라식 사상체계와 개념들을 익혀 후일 그의 작품에 녹아들어가게 된다. 그의 스승은 인문주의자 크리스토포로 란디노 Cristoforo Landino 였다. 한 동안 루크레츠에 탐닉하여 루크레츠 주석을 집필했으나 후일 태워버렸다. 그의 주 관심사는 플라톤이었으며 1456 학창시절에 처음으로 플라톤의 사상을 요약한 논문을 집필했다. 당시에 피치노는 아직 플라톤 원본을 읽을 수 있을만큼 그리스어에 능통하지 못했으므로 라틴어로 번역된 부족한 문헌을 참고로 해야 했다. 코시모와 란디노의 조언에 따라 피치노는 우선 그리스어를 독파했다.
고대 문헌 해독
대학을 수료한 후 피치노는 고향으로 돌아가 코시모의 전격적인 후원 하에 학문에만 전념한다. 피치노는 코시모를 제2의 아버지로 여겼다. 피렌체와 근교 카레지Caregig에 각각 집을 사주어 가까이 있게 했다. 코시모 자신이 카레지에 큰 빌라와 넓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바로 이 카레지 빌라가 후에 플라톤 아카데미가 들어있었다는 소문이 난 곳이다. 피치노는 매우 소박한 삶을 영위했다고 한다. 그의 목표는 오로지 플라톤을 비롯한 고대 문헌을 해독하는 것이었다. 동쪽 콘스탄티노플이 붕괴되면서 그곳에서 보유하고 있던 수많은 그리스 필사본들이 서쪽 이태리로 전해졌다. 코시모 사후 (1464)에도 피치노는 메디치 가문의 귀빈대접을 받았다. 우선 코시모의 장자 피에로가 피치노의 작업을 계속 지원했으며 1469년 이후로는 코시모의 손자, 피에로의 아들 로렌초가 피치노의 지원을 맡았다. 메디치 가문에게 피치노는 가족 구성원과 다름없는 존재였다.
코시모가 의뢰한 그의 최우선 과제는 플라톤의 대화를 완역하는 것이었다. 코시모 생전에 그 중 10권을 번역했으며 코시모 임종 며칠 전에 읽어주었다고 한다. 피에로 시대에 다음 아홉권을 번역했으며 1484년 드디어 완역판이 출간되었다. 이어 플라톤의 향연 혹은 연애론 심포지온Symposion의 번역을 시작했다. 이 향연의 해제본이 피치노의 대표작이 된다. 일곱명이 대화하는 형식으로 집필되었으며 메디치 빌라에서 플라톤의 탄생 기념일에 벌어졌던 연회를 무대로 삼았다. 이후 플라톤의 대화 해제본을 차례로 집필하고 1496년 이를 모아 작품집을 출간했다.
한편 피치노는 젊은 천재 조반니 미란돌라 Giovanni Pico della Mirandola 1463 – 1494)를 만나 교우하게 되면서 그에게 신플라톤주의자 플로틴의 작품을 번역하라고 종용한다. 2년 후 번역이 완결되었으며 피치노가 이에 해제를 붙여 1492년 출간했다. 이로써 플라톤의 전 철학체계로 향한 문이 대중들에게도 활짝 열리게 되었다. 플라톤 외에도 수많은 그리스 철학서 및 초기 기독교 신학서들을 번역하고 주석을 붙였으며 단테의 정치철학 논문 De monarchia를 이태리어로 번역했다.
플라톤 주의의 개혁과 전파
피치노는 다른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과는 달리 고전문학이나 언어의 정립 등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으며 그 보다는 철학적 내용이 주관심사였다. 그는 고대그리스 철학을 시대에 맞게 해석하고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피치노 사상의 핵심은 물론 플라톤이었으나 신플라톤파의 플로틴의 개념을 빌어 플라톤을 재해석했다. 이미 중세 후기에도 많은 학자들이 신학과 플라톤의 철학을 접목시키고자 노력했었다. 피치노의 경우 중세 학자들보다 원전에 더 많이 의존할 수 있었으므로 이를 바탕으로 하여 기독교의 원리와 플라톤 사상을 조화시키는 방법을 찾고자 했다. 기독교적 신비주의와 철학 사상이 상호 융합하여 새로운 하나의 체계로 탄생시키고자 했으며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그는 인문주의자들 중 기독교성을 강하게 띤 그룹에 속한다. 1474년에 탈고하고 1482년에 출판된 작품 “플라톤 신학”을 통해 그 자신의 사상체계를 완성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이념을 퍼뜨리는 데에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1473년 피치노는 사제서품을 받고 성직자의 길에 들어선다. 그 동기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으나 로렌초가 그를 주교로 추대하려다 실패했다는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메치디 가문과 일종의 협약이 있었을 수도 있다. 피치노는 이제 설교대에서 그의 플라톤 철학에 의거한 신학을 설파할 수 있었다. 그 뿐 아니라 유럽 전역의 여러 철학자들 및 세력가들과 서신교환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널리 알렸다. 이 서한들은 사실 수신인들 뿐 아니라 대중을 향한 연설과 다름이 없었으며 1495년 서간집으로 출판되었다.
위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카레지 빌라에 플라톤 아카데미가 설립되었고 피치노가 이를 이끌었다고 하는 설이 널리 퍼져있는데 최근 연구결과에 의해 사실과 다름이 밝혀졌다. 실제로 플라톤 아카데미는17 세기에 만들어진 개념이며 피치노 자신이 그의 제자들을 일컬어 “아카데미언”이라고 부른데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 그의 제자들 중에는 피치노의 플라톤 열정이나 아리스토텔레스 비판론을 따르지 않은 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James Hankins, Humanism and Platonism in the italian Renaissance II, Roma 2004, pp. 185-395]
의약서적
의사의 아들로서 스스로 의학을 공부하기도 했던 (수료는 하지 않았다고 함) 피치노는 의약에 대한 저서도 여러 권 집필했다. 페스트 등 전염병의 예방치료법이 있으며 가장 유명한 것은 “생명서 3권 De vita libri tres”이다. 이 책은 특히 종일 읽고 쓰는 직업을 가진 학자들을 위해 쓰였다. 정신적인 일을 많이 하다보면 쓸개즙이 많이 분출되는 데 이 때문에 우울증에 걸리기 쉽다고 했으며 그 자신도 이 그룹에 포함시켰다. 이를 극복하는 식이요법을 제안하고, 학자들이 건강을 유지하고 오래 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하는지 방법론을 제시했다. 피치노는 약초나 식이요법 외에도 마술이나 점성술도 치료법에 포함시켰다. 1489년 이 책이 출판되자 대단히 인기를 끌었으나 이단의 의심을 받게된다. 그럼에도 1647년까지 무려 30 회 재판되었으며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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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de.wikipedia.org/wiki/Marsilio_Fic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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