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스탕 Constant (1920-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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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은  Constant Anton Nieuwenhuys 콩스탕 안톤 뉴어하우스이나 불어식으로 발음하여 콩스탕 뉘베니라고 불렸다.

♠ 1920년 7월 21일 암스테르담에서 출생

♣ 2005년 8월 1일 위트레히트에서 사망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 조형가, 비저니스트. 1950년대 후반부터 신바빌론New Babylon이라고 불리운 새로운 유토피아적 도시 개념을 개발하여 후세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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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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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1920-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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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스탕의 자화상. 1942년 작. 개인 소장. Photo: Tom Haartsen, Source: Stichting Constant

콩스탕의 자화상. 1942년 작. 개인 소장. Photo: Tom Haartsen, Source: Stichting Constant

[/responsive]이미 어린 시절에 열정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 독서와 음악도 즐겼으며 음악은 그의 생애를 통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바이올린과 기타를 연주했으며 자유분방한 집시 음악에 매료되었다.

열 여섯 살에 그의 첫 유화 “엠마오의 예수” 탄생. 가톨릭 환경에서 성장했으므로 그의 초기 작품에 자주 종교적 영향을 볼 수 있다. 만 스무살 되던 해에 카톨릭 교회에서 탈퇴한다.

1939-1941 암스테르담 예술대학에서 회화와 그래픽을 공부한다. 1942-1943 북 네덜란드의 베르헨에서 살며 작업한다. 이 시절에 세잔느의 그림을 만나 크게 심취했으며 그의 전 생애를 통해 세잔느의 영향이 남게 된다. 콩스탕이 1942년에 그린 그의 자화상에서 세잔느의 영향을 확연히 알아 볼 수 있다.

이 시기에 그의 처남 Jacob van Domselaer을 통해 스피노자, 데카르트, 칸트와 칼 마르크스 등의 철학에 접하게 된다. 특히 칼 마르크스의 예술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글에서 큰 감명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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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브라 시대 1948-1951

1946년 가을 콩스탕은 친구 한스 비스만과 함께 파리로 간다. 파리의 미로 전시회에서 덴마크 출신의 화가 아스게르 요른[1]Asger Jorn 1914-1973, 덴마크 예술가 을 만나 의기 투합한다. 요른을 통해 덴마크의 실험주의자들을 알게 된다 이들과 함께 이년 뒤에 결성하게 될 코브라의 준비 작업을 시작한다.

1947년 카렐 아펠과 Karel Appel과 코르네이유 Corneille[2]본명: Guillaume Cornelis van Beverloo 1922-2010가 콩스탕의 강연을 듣고 찾아 온다. 서로 뜻을 나누기에 이들과 함께 네덜란드 실험 그룹을 결성하고 Relex라는 예술 잡지를 창립한다. 창립호의 선언문에서 콩스탕은 “회화란 색과 선을 조합하는 것이 아니라 동물, 밤, 비명, 인간 등 그 모든 것을 하나로 조합하는 것이다. 라고 선언하고 아이들과 원시적인 것을 받아들여야 느낌을 표현하는 이상적인 길이 열린다고 한다.

콩스탕은 그룹의 이론을 담당한다. 그의 모든 경력을 통해 콩스탕은 강한 사회비평가로 남는다. 그는 예술은 실험적이어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따랐다. 완벽한 자유에서 얻어 진 체험에서 새로운 창의력이 나온다고 믿었다. 그의 선언서는 이차대전 이후 네덜란드의 예술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는 예술 창작의 과정이 작품보다 중요하다고 여겼다.

11월 8일, 파리의 노트르담 카페의 테라스에서 네덜란드, 덴마크와 벨기에 실험예술가들이 모여 코브라 그룹 을 결성한다. 그들은 모두 파리에서 개최된 국제 아방가르드 다큐 컨퍼런스에 참가하기 위해 파리에 왔으나 프랑스 초현실주의 혁명가 대표들 사이에 공익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여기고 컨퍼런스를 떠나 별도의 그룹을 창시한 것이다. 벨기에 출신의 화가 크리스티앙 도트레몬트[3]Christian Dotremont, 1922-1979, 벨기에의 화가, 시인 가 파리의 초현실주의자들의 선언서에 반대하는 선언서에 모두 사인한다. 그룹 이름 코브라는 코펜하겐, 브뤼셀과 암스테르담의 첫 글자들을 따서 만든 합성어이다. 이들은 예술에서는 미학을 거부하고  사회에서 부르조아 층을 전면 거부했다.

코브자 책자 발간된 뒤 여러 예술가들이 합류. 콩스탕은 시인 게릿 카우나르[4]Gerrit Kouwenaar 1923-2014, 네덜란드 시인 과 함께 Goede Morgen Haan이라는 시집 발간.

1949년 암스테르담 시립미술관과 1951년 벨기에의 리에주에서 코브라 그룹 전시회 개최.

코브라 시절 콩스탕은 매우 활발한 작품 생활을 한다. 그 자신의 말을 빌면 이 시기에 그린 그림이 이후 전 생애를 통해 그린 그림보다 많았다고 한다. 이때의 대표작으로는 흰 새 (1948), 작은 사다리 (1949) 및 재가 된 땅 (1951) 등이 있다.

1949년 코브라 그룹에서 일본 출신의 미국인 조각가 신키치 타지리Shinkichi Tajiri 를 암스테르담 전시회에 초대. 이후 콩스탕과 타지리 사이에 평생의 지기가 된다.

암스테르담 전시회는 파격적이라는 말로 설명이 부족하다. 작품은 물론이고 전시된 방법 등도 파격적이어서 언론과 대중으로 부터 극심한 비평이 쏟아졌다. 쓰레기 같다거나 우리 아이들이 해도 이보다는 잘 하겠다는 평이 대부분이었다. 코브라 예술가들은 글이나 끄적거리는 사기꾼으로 치부되었다.

1951년 리에주에서 열린 전시회와 10회 회보를 마지막으로 코브라가 해산된다. 십년 후 크리스티앙 도트레몬트가 회고하기를 보통 예술가로 전락하느니 차라리 아름답게 전사하는 길을 택했다고 한다. 비록 삼년도 존속하지 않았으나 코브라는 유럽 전후 예술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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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합성을 향해 1952-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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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스탕 작. 사람과 집. 1952-1953. 암스테르담 시립박물관에서 열린 전시회 출품작. copyright: Fondation Constant

콩스탕 작. 사람과 집. 1952-1953. 암스테르담 시립박물관에서 열린 전시회 출품작. copyright: Fondation Consta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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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브라 시대 이후 콩스탕의 작품은 점점 추상적으로 변하고 건축과 공간예술 쪽으로 향하게 된다. 알도 반 아이크[5]Aldo van Eyck, 1918-1999, 네덜란드 건축가. 구조주의의 설립자로 여겨진다.의 책으로 건축학을 공부하기 시작.

1952년 가을 영국 예술가 협회의 장학금을 받아 런던에서 삼개월 간 체류. 여기서 헨리 무어 등 여러 예술가를 만나고 런던의 예술 환경이 파리보다 객관적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런던 체류 중 캔싱턴 파크 근방에 살며 매일 아침 전쟁으로 파괴 된 도시를 거닐며 어떤 구조의 도시를 만들어야 삶의 질을 높일 수 있을지 고민한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근대적 도시요소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인지하게 된다. 근대적 건축들은 우선 기능적이고 지루하다고 느낀다. 유희적이고 창의적인 삶을 위한 공간을 제공하지 않는다. 암스테르담으로 돌아 가 콩스탕은 건축과 도시 설계에 더욱 집념한다.

알도 반 아이크와 함께 “공간의 색을 위하여 For a spatial colorism” 라는 책을 낸다.  이 책은 근대 건축에색이 결여되었다는 사실에 반응하여 색과 공간의 관계를 실험적으로 조명한 것이다.  1952-53년 암스테르담 시립박물관에서 열린 전시회에 반 아이크와 함게 “사람과 집”이라는 작품을 전시한다. 1960년 이 작품으로 두 사람은 공동으로 시켄스 상을 수상하게 된다.

1954년 게릿 리트벨드[6]Gerrit Rietveld 1888-1964, 네덜란드 건축가, 디자이너. 더 스테일De Stijl의 … Continue reading  와 함께  모델하우스를 설계한다. 이 모델하우스는 암스테르담의 백화점에 실제 사이즈로 만들어 전시되었다.

코브라 시대에 이미 콩스탕은 개별 작업을 거부하고 공동작업을 추구했다. 이제 더 나아가서 예술 분야들 간의 합성을 요구하게 된다. 회화니 조각이니 건축 등 여러 분야 사이의 경계를 없애야 한다고 생각한다.이는 50년대 근대 건축의 단조로움과 정치적 영향력을 극복하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여긴다.

이 시기에 그와 뜻을 나누는 동지를 찾기 위해 CIAM을 방문하고 반 아이크 및 여러 건축가, 화가, 시인 등과 공동작업을 하기 위해 많은 프로젝트를 기획하나 그의 절실한 노력은 대부분 재정 문제로 무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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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상황주의 그룹 1958-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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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리 알바의 집시들을 위해 설계한 캠프의 모형. 신바빌론의 시작이 되었다. 1956년. 헤이그 시립박물관 컬렉션. Photo: Tom Haartsen

이태리 알바의 집시들을 위해 설계한 캠프의 모형. 신바빌론의 시작이 되었다. 1956년. 헤이그 시립박물관 컬렉션. Photo: Tom Haartsen

[/responsive]1956년 여름 9월 아스게르 요른의 초청으로 이태리 피몬테의 알바로 간다. 알바에서 열린 “상상 바우하우스” 콘그레스에 참여하여 “내일은 시심이 우리를 살게 할 것이다.”라는 제목으로 강연한다. 여기서 콩스탕은 창의력을 위한 건축의 자유를 주창한다. 같은 콘그레스에서 문자주의자 길 울만 Gil Wolman은 “통일된 도시성 Unitary Urbanism” 이라는 제목으로 예술과 기술의 합성에 대한 강연을 한다.

콩스탕은 가족과 함께 여러 달을 알바에 머문다. 그동안 알바의 집시들이 얼마나 비인간적인 환경 속에서 사는 지를 관찰한다. 이들을 돕기 위해 집시 캠프를 디자인한다. 이것이 신바빌론 프로젝트의 시작이 된다.

1956년 기 드보르가 알바로 콩스탕을 찾아 온다. 드보르는 1952년 국제 문자주의를 설립한 저술가, 영화제작자며 행위주의자로서 좀 더 급진적인 움직임을 구상하고 있었다. 미술을 완전히 배제하고 예술과 삶의 경계를 완전히 없애버린 심리지리학에 포커스를 맞추고자 했다.

1957년 드보르와 요른은 국제 문자주의자들과 상상 바우하우스 그룹을 병합하여 국제상황주의자 그룹을 결성한다. 콩스탕은 초기에 국제 상황주의자 그룹에 합류하지 않는다. 그룹 내에 건축가와 엔지니어들이 합류하지 않았으므로 콩스탕이 추구하던 진정한 코웍을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58 국제상황주의자 그룹이 균일한 도시성에 등을 돌리자 비로소 콩스탕이 합류한다. 콩스탕과 드보르 사이에 활발한 서신 교환이 이루어지고 콩스탕은 국제상황주의 매거진에 그의 이론을 자주 발표하게 된다.

요한 호이징가[7]Johan Huizinga 1872-1945, 네덜란드의 역사학자, 문화사가. 유희의 원리를 … Continue reading 의 저서 “호모 루덴스”를 읽은 뒤 콩스탕은 미래 도시에 대한 아이디어를 발전시킨다. 지도를 그리고 텍스트를 쓰고 구조물과 모형을 만들기 시작. 드보르가 콩스탕의 프로젝트를 바빌론이라고 칭하고 콩스탕이 신바빌론이라 고쳐 부른다. 뉴욕, 뉴델리, 뉴 올린스에서 착안 한 것이다. 1959년 처음으로 암스테르담 시립박물관에서 신바빌론 프로젝트를 선 보인다. 신바빌론 프로젝트가 큰 성공을 거두자 국제상황주의자들은 1960년 대형 전시회를 계획하나 구현되지 못한다. 그룹 내부에서 벌어진 갈등으로 인해 결국 여러 분파로 갈라진다. 1960년 콩스탕은 처음에 그룹에 합류하기를 꺼렸던 같은 이유로 그룹을 떠난다. 1961년 창립 멤버 중에 오로지 드보르 만이 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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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바빌론 1956-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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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바빌론 모형 중 노란색 섹터. 1967년. 헤이그 시립박물관 소장. Photo: Tom Haartsen

신바빌론 모형 중 노란색 섹터. 1967년. 헤이그 시립박물관 소장. Photo: Tom Haartsen

[/responsive]국제상황주의자 그룹을 떠난 콩스탕은 신바빌론 프로젝트에 몰두한다. 유희적 창의적 인간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세상의 모델을 만든다. 일에서 해방된 자유로은 인간들이 창의적 아이디어를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도시들이다. 이런 도시에서 예술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게 된다. 회화를 버리고 1974년까지 오로지 신바빌론 개발에 전념한다.

신바빌론에서 그는 세계적으로 서로 연계된 미래의 도시를 구상한다. 토지는 공동소유이며 일은 완전히 자동화된다. 일에서 벗어난 인간들은 이제 집시와 같은 생활을 영위한다. 신바빌론의 주민들은 호모 루덴스이다. 콩스탕의 표현을 빌면 신바빌론은 사람의 행위에 대해 오직 최소한의 조건만 제시해 주며 나머지는 가능한 최대로 자유롭다. 이동을 제한하거나 분위기를 창조하는데 대한 어떤 제한도 없다. 환경은 주민들의 삶에 의해 저절로 조성되고 결정된다.

콩스탕은 여러 조수들과 함께 플렉시 글라스, 스텐레스, 알루미늄, 철, 목재 등으로 모형을 제작한다. 모형을 네덜란드, 유럽 및 세계 지도 위에 펼쳐놓고 서로 연결시킨다. 모형 뿐 아니라 구조체, 회화, 그래픽, 콜라주, 리소그래피, 텍스트, 영화 등의 매체를 모두 동원하고 수없이 강연을 다닌다. 콩스탕에게 신바빌론은 미래 도시에 대한 복안일 뿐 아니라 새로운 문화에 대한 복안이다.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코브라 그림 컬렉션을 팔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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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스탕 Constant 1974, Photographer: Hans Peters / Anefo, Source: Nationaal Archief

콩스탕 Constant 1974, Photographer: Hans Peters / Anefo, Source: Nationaal Archi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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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헤이그의 시립박물관에서 개최된 대형 전시회를 마지막으로 신바빌론 프로젝트가 완료된다. 콩스탕은 수많은 모형과 구조물들을 보관할 공간이 없으므로 박물관에 작품의 대부분을 넘겨준다. 1980년 델프트 대학에서 한 강연을 통해 콩스탕은 신바빌론 프로젝트의 완성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아직 사람이 살지 않은 세상에 대해 매우 구체적으로 설계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 세상을 우리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는 사람들로 채우는 것은 어렵다.  우리는 그들의 유희적이고 창의적인 삶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규칙을 만들 수도 없고 대신해 줄 수도 없다. 우리는 우리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과학을 예술로 변화시킬 수 있다. 바로 이것이 더 이상 모델을 만들지 않으려는 이유이다. 이제 다시 그림으로 신바빌론의 삶을 그려낼 것이다.

내가 할 일은 여기까지다.  프로젝트는 존재한다. 어느 박물관에 보관될 것이며 때가 오기를 기다릴 것이다. 언젠가 미래의 도시 디자이너들이 이에 대한 흥미를 가질 때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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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뉴욕의 드로잉 센터에서 “콩스탕의 신바빌론: 다른 삶을 위한 도시”라는 제목으로 전시회가 열린다. 북미에서의 첫 개인 전시회였다. 마크 위글리 Mark Wigley 가 큐레이터를 담당했으며 전시회에 이어 광범위한 카탈로그가 발간되었고 “행동주의자의 그림: 콩스탕의 신바빌론과 그 너머의 상황주의 건축가들의 자취를 따라서”[8]The Activist Drawing: Retracing Situationist Architecture from Constant’s New Babylon to Beyond.라는 제목으로 심포지엄이 열렸다.

렘 콜하스에 따르면 신바빌론은 많은 건축가들에게 중요한 양식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용기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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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1974-2005

근 십오년 간 신바빌론에 몰두한 뒤 1969년 콩스탕은 다시 회화로 돌아가 수채화, 유화와 그래픽으로 돌아간다. 1974년 전시회가 끝난 뒤 그는 작업실을 말끔히 비우고 그림 재료를 다시 구입하여 그림그릴 준비를 한다. 그럼에도 건축적 요소는 그의 그림에 흔적을 남긴다. 콩스탕은 매일 뉴스를 통해 베트남 전쟁, 아프리카 분쟁, 코소보 난민 등에 영감을 받는다. 그의 작업은 세상일에 대한 관심을 보이는 그의 방식이다. 마르크스 주의는 여전히 그의 작업에 가장 큰 바탕이 된다. 그는 하필 회화가 예술 매체로서 효력을 상실해 가는 시점에 다시 회화로 복귀한 것에 대해 비판 받기도 했다.

1995년 출간된 콩스탕 회화집의 서문에서 루디 훅스는 이렇게 말한다.

일각에서는 콩스탕이 회화로 돌아간 것은 전통으로 복귀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1970년대 콩스탕은 회화라는 정원에 더욱 깊이 침투한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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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스탕은 티치안 등의 르네상스 화가들에게 영감을 받아 컬러리즘 테크닉을 적용한다. 이 테크닉은 연필이나 숯으로 밑그림을 그리지 않고 화폭에 유화물감을 직접 칠한다. 윤곽을 뚜렷하게 그리지 않고 부드럽게 색을 입히는 테크닉으로 여러 층을 겹쳐 그렸다.

콩스탕은 그의 마지막 날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그림을 그린다.

1991년 레지스탕스 예술 재단에서 1942-1945년 사이의 작품을 치하하는 상을 받는다. 그는 “여전히 레디스탕스”라는 제목의 수상 소감을 발표한다. 마지막 7개월 동안 그의 생애와 작품에 대한 다큐 영화가 제작된다.

2005년 콩스탕은  위트레히트에서 생을 마감한다.

그의 마지막 작품 “매복 The ambush”은 콩스탕에게 일어난 불미스러운 에피소드를 극복하기 위해 그리기 시작했으며 연작으로 여러 점을 그린다. 2001년 콩스탕은 우연히 어느 학자가 그의 학위 논문에서 콩스탕이 이차대전 당시 나치의 문화협회에 등록되어 있었다고 말햇다. 그는 네덜란드 홀로코스트 연구원의 자료를 출처로 인용했다고 밝혔으나 홀로코스트 연구원에서는  해당 문서가 목록에 나타나 있으나 문서 자체는 분실되었다고 밝혔다. 누가 문서를 제출하고 누가 파괴했는지 알 수 없다고 했다. 해당 논문에서 문제시 된 문장이 결국 삭제되었으나 콩스탕은 깊이 상처받고 연작을 그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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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스탕의 마지막 작품 "매복". Source: Collection Fondation constant, Photo: Tom Haartsen

콩스탕의 마지막 작품 “매복”. Source: Collection Fondation constant, Photo: Tom Haarts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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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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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각주
1 Asger Jorn 1914-1973, 덴마크 예술가
2 본명: Guillaume Cornelis van Beverloo 1922-2010
3 Christian Dotremont, 1922-1979, 벨기에의 화가, 시인
4 Gerrit Kouwenaar 1923-2014, 네덜란드 시인
5 Aldo van Eyck, 1918-1999, 네덜란드 건축가. 구조주의의 설립자로 여겨진다.
6 Gerrit Rietveld 1888-1964, 네덜란드 건축가, 디자이너. 더 스테일De Stijl의 일원이었다.
7 Johan Huizinga 1872-1945, 네덜란드의 역사학자, 문화사가. 유희의 원리를 밝힌 “호모 루덴스”의 저자.
8 The Activist Drawing: Retracing Situationist Architecture from Constant’s New Babylon to Beyo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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