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시모 공작 Cosimo I. de’ Medici (1519 – 1574)
메디치 가문의 일원으로 교황의 인정을 받아 피렌체를 중심으로 토스카나 대공국을 통치했다. 피렌체의 보볼리 정원과 피렌체 근교의 카스텔로 빌라 정원을 조성하게 하여 르네상스 정원의 대표적인 작품을 남겼다.
코시모 공작은 메디치 가문의 적손이 아니고 가문을 세운 일명 조국의 아버지 코시모 데 메디치의 동생의 후손이었다. 그러므로 본래 피렌체 통치자 순열에 들지 않았다. 적통의 마지막 자손이 그 유명한 카타리나 데 메디치 였으며 코시모와 동갑이었다. 당시 가문의 실질적인 권력을 쥐고 있던 교황 클레멘스 II세는 코시모와 카타리나의 당숙뻘이었는데 여식에게 피렌체의 통치를 맞길 의향이 전혀 없었다. 그는 카타리나를 프랑스의 왕자와 정략 결혼시켜 떠나보내고 자신의 사생아였던 알레산드로를 피렌체의 통치자로 만들어 자신의 권력구도를 다졌다. 이때가 1531년이었다. 당시 신성로마황제 카를 V세가 피렌체를 공략하여 공화정을 무너뜨린 뒤 토스카나 지방을 공작령으로 만들었던 격동의 시대였다. 클레멘스 교황은 카를 V세와 끈질긴 협상 끝에 알레산드로의 공작 작위와 토스카나의 통치권을 얻어냈다. 이로써 피렌체의 공화국 시대가 끝나고 세습 공작 통치시대가 시작되었다.
알레산드로 공작은 무능하고 성정이 포악하여 민심을 얻지 못하다가 6년 후 1537년에 자신의 사촌에게 암살당했다. 알레산드로에게 비록 다섯 살의 어린 아들이 있었으나 서자였고 적통의 카타리나는 이미 프랑스 왕비가 되었으므로 결국 시민대표들이 지지하는 코시모에게 작위가 돌아갔다. 당시 십 칠세의 약관이었으나 야심이 많았고 엄청난 부의 소유자였으므로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나이가 어렸으나 주관이 뚜렷하고 정치와 외교술에 모두 능했다고 하며 스스로를 다른 나라들의 왕과 동일한 군주로 여겼다. 그의 통치하에 피렌체와 토스카나는 다시금 안정을 찾았으나 반 메디치 세력들의 움직임이 끊이지 않아 늘 목숨의 위협을 받았다.
코시모 공작은 그의 조상들과는 달리 인문주의적 성향을 물려받지 않았다. 예술을 지원하고 예술가들을 후원하기는 했으나 본인의 취향보다는 가문의 전통을 따른다는 의미가 더 컸다. 그럼에도 건축가 벤베누토 첼리니 Benvenuto Cellini (1500 – 1571), 화가 죠지오 바사리 Giorgio Vasari (1494 – 1557) 등과 함께 많은 프로젝트를 성사시켰다. 로렌초가 아들처럼 여기고 후원을 아끼지 않았던 미켈란젤로는 메디치 가문이 공화국의 이상을 버리자 실망하고 가문에 등을 돌린 뒤 코시모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미켈란젤로의 유명한 다비드 상은 메디치 가문에 저항하는 공화국을 상징한다.
코시모 공작은 역사에 흥미를 가져 고대사 연구를 적극 후원했고 많은 역사적 유품들을 수집했다. 무엇보다도 식물 재배에 관심이 많아 피사 대학에 식물원을 설립하고 보볼리 정원과 카스텔로 정원이라는 유산을 남겼다.
참고 문헌:
- Attlee, Helena; Ramsay, Alex (2006): Italian gardens. A cultural history. London: F. Lincoln.
- Brion, M. (1970): Die Medici: eine Florentiner Familie: Brockhaus.
- Durant, Will; Durant, Ariel (1978): Kulturgeschichte der Menschheit. 1. Aufl. München: Südwest-Verl.
- Pavord, Anna (2008): Wie die Pflanzen zu ihren Namen kamen. Eine Kulturgeschichte der Botanik. 1. Aufl. Berlin: Berlin Verlag.
© 서양조경사 백과/코시모 공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