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상황주의 그룹 Situationist International S. I.

국제 상황주의 그룹 Situationist International S. I.은 1957년에 유럽의 좌익 계열의 예술가, 지식층이 모여 결성하였으며 1960년대에 왕성하게 활동했다.  정치적 좌파들, 특히 1968년파리  5월 혁명세력들에 큰 영향을 미쳤다. 국제 예술계, 특히 팝 문화를 통한 소위 “커뮤니케이션 게릴라” 작전을 펼쳤다.  가입된 회원수는 매우 적어서 총 70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1972년 자진 해체했다.

콘셉트


예술과 정치, 건축이 접목되는 지점에서 활동했으며 예술을 일상 속에 수렴하기 위해 애썼다. 제품, 임금노동,  기술관료제도와 위계에서의 탈피를 주장했다. 그 대신 이론적, 실질적 상황의 창조를 통해 삶 그 자체가 예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컨셉이었다. 일부 멤버들은 1968년 프랑스를 휩쓸었던 학생운동에 관여되었다. 당시 프랑스의 학생운동은 근로자 층도 참여했다.

상황주의자들의 이념은 이후 널리 전파되어 예술, 정치, 건축 및 팝아트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큰 흔적을 남겨 현재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그들의 영향은 플럭서스 Fluxus등의 전위예술과 행위예술로 귀결되었다.

상황주의자들이 내건 슬로건은 :

  • 금지는 금지야!
  • 페이빙 밑에 모래 사장이 있어.
  • 일? 절대 안해!

역사


1950년대 프랑스의 사르트르와 카뮈로부터 출발했으며 기 드보르1)Guy Debord (1931~1994), 프랑스의 작가, 영화인, 예술가, 혁명가로서 국제상황주의의 중요한 설립 멤버였다. 라는 인물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드보르는 상황주의 이론의 정립에 결정적으로 기여했으며 그룹의 추기경과 같은 역할을 했다.

드보르가 19세 되던 해 칸 영화제에서 초현실적인 문자주의 예술가들을 우연히 만나 이들의 이념에 매료되어 합류하게 된다. 문자주의자들은 매우 급진적인 보헤미안 풍의 라이프 스타일을 영위했으며 Isidor Isou라는 기존 영화의 틀을 과감하게 파괴한 초현실적인 영화를 칸 영화제에 출품하여 물의를 일으켰다.

문자주의자들은 포트락 Potlach이라는 잡지를 발행했으며 이때 이미 후일 상황주의자들의 명제와 개념들의 기틀이 놓여졌다고 여겨진다.  문자주의자 그룹이 해체된 후 드보르 등은 국제 문자주의 모임으로 재결합했다. 이브 클랑  Yves Klein, 르네 마그리트 René Magritte 등의 예술가들도 문자주의자들과 연락을 취하는 관계였다.

설립


1957년 7월 28일에 공식적으로 결성되었다. 아스게르 요른 2)Asger Jorn (1914~1973), 덴마트의 화가. 표현주의 경향을 보였다. 한 동안 파리에서 활동했으며 이때 건축가 르 코르뷔제의 에스프리 누보관 건축의 장식을 맡기도 했다. 1948년 덴마크에서 예술가 그룹 코브라 CoBRA결성.이 결성한 “바우하우스 상상운동”3) Mouvement pour un Bauhaus Imaginiste: 산업사회에서의 예술가의 역할을 연구하는 그룹과 랄프 럼니 Ralph Rumney가 결성한 런던의 “심리지리학회” 를 국제문자주의와 통합한다.  통합의 목표는 예술과 생활 사이의 경계를 없애기 위함이었다.

국제 상황주의자에는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 이태리, 벨기에, 알제리, 튀니지 등  10개국의 예술가들이 합류했다. 4)링크: 국제 상황주의 예술가 명단

활동


국제상황주의자들은 회화 뿐 아니라 예술 이론과 예술사  및 도시계획을 연구했다. 작품 기법으로는 회화 기법 외에도 콜라주 기법을 자주 이용했으며 일상에서 발견한 재료를 많이 활용했다. 예를 들어 아스게르 요른의 “유혹”이라는 작품은 따뜻한 색상의 풍경화 위에 사람의 형상을 크게 확대하여 덧붙이는 식이었으며 드보르는 아방가드르한 콜라주 영화를 제작했다.

시간이 흐르며 정치에 포커스를 두기 시작하여 예술 행위를 역사 문화적 프로시스를 형상화하는 것으로 파악했다. 이 과정에서 그룹 일원들 사이에 의견 충돌이 잦게 되어 자진 탈퇴하거나 탈퇴시키거나 그룹이 갈라지기도 했다. 기존의 틀에 부응하는 어떤 행위, 혁명적인 핵심에서 조금이라도 멀어지는 것을 배신으로 취급했다.

콘스탕 Constant


1957년 이후 여러 번 전시회가 개최되었으며 그 중 1960년 네덜란드 출신의 예술가 콘스탕 뉘베니  (본명은 네덜란드어로 Constant Nieuwenhuys이나 불어식으로 발음) 의 “신 바빌로니아 New Babylon”가 큰 주목을 끌었다. 산업의 자동화로 인해 직업선상에서 내몰린 한 인간이 ‘놀며’ 움직일 수 있는 가상의 도시를 창조했다. 여기서 이제야 비로소 내재한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로 해석되었다. 이로써 콘스탕은 르 코르뷔제가 구상한 완벽히 통제되는 도시에 대한 정면으로 반하는 도시를 설계한 것이다. 1959년 콘스탕은 암스테르담 주식시장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놀이터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그는 이미 1956년 북이탈리아의 집시 그룹을 위해 캠프를 설계한 바 있다. 콘스탕의 작품은 회화와 건축 사이에 놓여 있다. 그는 매우 구체적인 컨셉을 제시했으나 신축 건물 만이 이용가치가 있다는 그의 사상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드보르의 경우 층층이 쌓여진 도시 역사의 흔적을  중요시 여겼다. 이런 의견 차이로 인해 그룹 내에 균열이 생기게 되었다.

이론


상황주의자들은 정기적으로 국제회의를 개최함으로써 이론을 정립하고 토론하는 기회를 가졌다. “국제상황주의”라는 신문을 발행하여 그들의 이념을 발표했으며 세계정세에 대한 의견을 발표했다. 정치적 문화적 엘리트를 공격하고 폄하하기를 일삼았다. 그들과 유사한 생각을 가진 인물들도 공격을 피할 수 없었다. 1961년 독일에서 압수당했으며 일부 멤버들이 구속되었다. 상황주의자들의 적은 사회학자들이었으며 그 외에도 스탈린주의자들이 천적과 같았다.

드보르는 1957년 국제 상황주의 이념에 대한 글들을 발표했으며 그 중에서 1967년에 발표한 “스펙터클한 사회”라는 논문이 주요작으로 여겨진다.

벨기에 출신의 상황주의자 라울 바네겜5)Raoul Vaneigem*1934, 벨기에의 예술가, 저술가, 문화철학가. 젊은 세대가 살아가는 법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은 1967년 “젊은 세대가 살아가는 법”이라는 책을 통해 재능, 주관성, 시심 및 놀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의 견해로는 근대가 줄 수 있는 것은 불명예스러운 합리성으로 점철된 “살아 남기” 뿐이며 삶이 아니라고 했다.

아스게르 요른의 경우 “열린 창의성과 적들”이라는 책을 통해 창의적인 행위를 하는 이상적인 인간상을 구상하고 이에 어떤 장애물이 있는지 고찰했다.

스트라스부르 스캔들


1966년 스트라스부르에서 “대학생들 환경의 처참함에 대하여, 경제적, 정치적, 성적, 특히 지적 경향과 해결방안” 이라는 소책자가 발행되었다. 학생들이 스트라스부르 대학의 비용을 써서 일만 부를 인쇄하여 배포했다. 발행인을 무정부주의를 옹호하는 이들이라고 표기한 이 책자 속에서 상황주의자들은 대학생들이 사회로부터 마치 미성년자처럼 사회에 종속되어 있으며 학생신분의 특권으로 여기는 대학생 문화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뿐만 아니라 종교와 경제체계 역시 신랄한 비판을 변치 못했다. 저자들은 교육이 산업화되고 있음을 아무도 인지하지 못함을 맹렬히 공격했다.

인쇄에 참여한 학생들은 학교에서 퇴학 당했다. 그러나 이 책자는 1968년 학생운동에 참여한 학생들 사이에 불같이 번졌으며 여러 개국 언어로 번역되었다. 스트라스부르 대학의 총장은 책자 발간인들을 정신병자라 비난했다.

1968년 5월


1968년 5월 프랑스에게 소요가 일어났다. 소르본느 대학을 점령한 학생들의 저항운동이 총파업으로 번졌다. 이때 학생들 사이에 섞여 시위에 참가했던 상황주의자 Rene Vienet과 두 명의 멤버들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다.

자본화 된 세상이 멈추었다. 기차도, 자동차도, 근로도 없이 시위대들은 공장과 도로와 텔레지변 앞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았다. 하릴없이 배회하고 꿈꾸며 사는 법을 다시 익혔다.

1968년 문화혁명의 추진세력이 되었다는 점과 몇몇의 예술 스캔들을 제외하면 상황주의자들의 급진적 요구는 대부분 이론에 머물렀다.

상황주의의 끝


1972년 그룹이 해체되었다. 당사자들의 말에 의하면 메너리즘에 빠져 굳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였다고 한다. 그러나 국제적으로 번졌던 학생 운동의 결과에 실망하여 해체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해체되었던 시점에는 드보르 주변에 단지 몇몇의 일원들만 남아있던 상태였다. 다만 영국에서는 비교적 오랫동안 상황주의 세력이 지속되었다. (King Mobb, Bureau of Public Secrets 등) 킹 몹의 경우 성탄절에 백화점에 가서 장난감을 가져다 아이들에게 나눠주는 해프닝을 한 것 등이 전부였다.

영향과 유산


예술사적인 관점에서 상황주의자들은 포스트 모더니즘이 나타나기 전, 근대 고전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미국의 경우 엔디 워홀 등의 예술가들은 이미 상품 미학의 연작 등을 발표한 상황이었다.  포스트모더니즘과 함께 언어와 전략에도 변화가 와서 공격성 보다는 아이러니 혹은 표상적 확언 등이 나타났다. 드보르의 관점에서 볼 때 급진적인 부정의 경향은 여전히 존재한다고 보았다. 팝아트 및 이와 유사한 흐름은 상황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결코 예술의 끝이 아니라고 보았다.

상황주의 예술에 대해서 지금까지도 매우 상반되게 토론되고 있다. 상황주의자들을 순수한 아방가르드 경향으로 보는 해석에서부터 매우 급진적인 태도를 보이는  건축 이론적인 예술가 그룹으로서 그들의 이론이 응용되고 있다는 해석과 극좌파의 정치적 집단으로 보는 시선도 있다. 당시 그룹 내부에 존재했던 다양한 방향을 감안하지 않고 그 중 한 부분만을 평가하는 데서 온다. 상황주의자들은 그들의 요구를 처음부터 정치적인 것으로 이해했다. 예술과의 관계 혹은 예술의 역할에 대한 이념은 그룹 회원들의 구조에 따라 시간이 흐르며 변천을 겪었다.

상황주의자들이 내걸었던 요구사항들을 오늘은 압축하여 “68”년 시대라고 표현한다. 그들의 유산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예술 분야

플럭서스 예술가들이 부분적으로 유사한 목표를 설정하고 방법론을 적용했다. 다만 상황주의자들에 비해 정치성이 약했고 그들의 해프닝으로 좀 더 안전한 예술 무대 위에서 움직였다.

지금도 상황주의를 인용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1990년대 중반에 함부르크에 조성된 픽션파크 Park Fiction 등이다.

칼스루에의 예술과 미디어 테크놀로지 센터에서 2001년 대규모의 기 드보르 특별전을 개최한 바 있으며 2007년 4월 4일에서 8월 5일 사이에 바젤의 팅글리 박물관 Tinguely 에서 우트레히트 중앙박물관과의 협업으로 국제 상황주의에 대한 광범위한 전시회를 개최하는  등 그 영향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볼 수 없다. 상황주의의 연구 분야 중 하나였던 사회지리학은 현재 건축심리학에 수용되었다.

음악

상황주의자들의 이념 혹은 급진적 미학은 몇몇 하드코어 펑크 밴드들, 즉 워싱턴 밴드 The Nation of Ulysses 나 스웨덴의 Band Refused 등에서 물려받았다. 이 밴드들의 디스크에 포함된 책자를 통해 예술과 일상의 경계의 파괴를 요구하고 있다. 그들은 자본주의의 극복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 외에도 Manic Street Preachers, Beck, Die Goldenen Zitronen, Bernadette La Hengst, Schwabinggrad Ballett, Tocotronic, Pussy Riot 등 역시 상황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았다.

철학

포스트모더니스트 (포스트 구조주의)들이 상황주의의 이념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예를 들어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는 사실과 가상의 차이가 없음을 주장하고 이에 근거하여 비평의 불가능성을 말했다. 미국의 작가 그레일 마커스Greil Marcus는 그의 서적 “립스틱 자국”에서 기독교적 신비주의와 다다이즘, 아도르노의 철학과 상황주의자들 사이의 연관성을 찾았다.

한편 프랑스에서 1997년~2008년 사이에 발행된 공산주의 저널 “Oiseau-Tempête” 역시 상황주의자들의 이념에 영향을 받았다고 발효한 바 있다.

서브 걸처

말콤 맥라런 Malcolm McLaren (*1946)은 상황주의의 영향으로 펑크를 발명했다고 말한다. 상황주의들의 전략과 신념은 커뮤니케이션 게릴라나 헤커 문화에 지금도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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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 ]

1. Guy Debord (1931~1994), 프랑스의 작가, 영화인, 예술가, 혁명가로서 국제상황주의의 중요한 설립 멤버였다.
2. Asger Jorn (1914~1973), 덴마트의 화가. 표현주의 경향을 보였다. 한 동안 파리에서 활동했으며 이때 건축가 르 코르뷔제의 에스프리 누보관 건축의 장식을 맡기도 했다. 1948년 덴마크에서 예술가 그룹 코브라 CoBRA결성.
3. Mouvement pour un Bauhaus Imaginiste: 산업사회에서의 예술가의 역할을 연구하는 그룹
4. 링크: 국제 상황주의 예술가 명단
5. Raoul Vaneigem*1934, 벨기에의 예술가, 저술가, 문화철학가. 젊은 세대가 살아가는 법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I footnot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