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공예운동 Arts & Crafts Movement
미술공예운동은 19세기 중엽에서 1920년경까지 영국에서 일어났던 예술경향으로 기계적인 대량생산의 시대에 수공예를 복구시키고 순수예술과 응용예술을 서로 결합시켜 수공예의 수준을 산업제품에 대비시키려 했던 움직임이었다. 사회적, 경제적 혁신의 이념이 배어 있으며 반산업주의를 주창했다. 당시 유럽에서 탄생했던 여러 예술사조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21세기에 다시금 생활용품, 장신구, 가구, 실내장식 등에서 공방예술이 부활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1887년 미술공예전시협회의 모임에서 처음으로 미술공예라는 개념이 쓰였으나 사실적으로는 이미 그보다 20년 앞서 시작되었다. 건축가 어거스트 푸긴August Pugin, 저술가 존 러스킨 John Ruskin, 디자이너며 시인이었던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 등이 창시했다. 이 움직임은 영국 전체에 확산되었으며 곧 유럽과 미국으로 전파되었다.
19세기 중엽 존 러스킨, 윌리엄 모리스 등을 중심으로 하여 화가, 건축가와 디자이너들이 시작했다. 러스킨은 예술과 사회, 노동의 상호연계성에 대해 고찰했으며 모리스는 러스킨의 철학을 실제로 구현했다. 수공예의 가치를 높이 샀으며 자연적인 소재의 아름다움을 추구했다. 당시는 빅토리아 시대의 역사주의 사조와 산업혁명으로 인해 대량생산된 제품들의 값 싼 디자인에 대한 저항이었다. 그들은 기계에 모든 책임이 있다고 여겼으며 수작업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수작업으로 제작한 작품들의 아름다움과 튼튼함의 가치를 높이 샀다.
1851년 런던에서 개최되었던 세계박람회가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때 바로 그 유명한 수정궁 Christal Palace이 세워졌다. 세계 각국의 산업제품, 기계, 공예품을 전시했으며 전보기술, 고무소재로 만든 의자 등 새로운 소재와 기술이 소개되었다. 다만 소개된 제품들의 디자인 수준에이 조악하다는 비평이 가해졌다. 즉, 새로운 상품은 쏟아져 나오지만 이들을 커버할 디자인 양식이 아직 없었으므로 지나 간 시대의 모든 디자인 요소들을 차용했었다. 이를 역사주의라고 하며 산업제품의 경우 장식적 요소를 과다하게 덧붙이거나 값싸게 모방하는 수준이었다.
미술공예운동의 핵심은 디자인에 앞서 제작기법을 기계적인 것에서 수작업으로 되돌리는 거였으며 고급의 자연소재를 쓰는 것이었다. 특히 소재의 선발과 가공법에 심혈을 기울였다. 1870년~1920년 사이에 미술공예운동이 절정에 달했다. 거의 사회개혁에 버금갈 정도로 생활 전반에 큰 영향을 주었다. 여기서 아르누보, 빈의 분리파, 빈의 공방, 독일의 공작연합, 바우하우스 등으로 연결되었다.
조경과 정원계에서는 윌리엄 로빈슨, 거투르드 지킬 등이 등장하여 존 러스킨 등과 교감하며 정원의 혁신을 가져오게 된다. <고정희>
참고 문헌
- Hardy, William (1996): A guide to art nouveau style. North Dighton, MA: JG Press.
- Rundfunk, Bayerischer (2016): Stil-Epochen: Floral – Jugendstil und Art Deco | BR.de. http://www.br.de/fernsehen/ard-alpha/sendungen/stil-epochen/stil-epochen-jugendstil12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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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 미술공예 계열의 건축가, 디자이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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