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바빌론 New Babylon
[dropcap style=”default, circle, box, book”]신[/dropcap]바빌론은 네덜란드 출신의 예술가 콩스탕이 1950년대에 제안한 새로운 개념의 유토피아적 도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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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 “자유”
콩스탕의 바빌론은 경계와 한계가 없는 도시이다. 모든 것이 자동화 된 미래의 세상에서 사람들은 일에서 해방되어 창의적 삶을 살 수 있는 자유를 영위한다. 창의적 삶은 놀고 방랑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이를 위해 콩스탕은 기존의 도시 위에 부유하는 새로운 도시를 설계했다. 1952년 경부터 구상을 시작하여 전람회를 통해 여러 차례 선 보인 후 1959년부터 1974년까지 15년 간 오로지 신바빌론을 개발하는 데 전념했다. 모형, 구조물, 지도, 영화, 텍스트와 강연 등 모든 매체를 총 동원하여 대중에게 신바빌론의 비전을 알렸다.
콩스탕은 구체적인 도시를 설계한 것이 아니라 가능성 만을 보여주는데 그쳤다. 주민들이 각자의 욕구와 필요에 따라 스스로 만들어 가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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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컨셉 개발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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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당시 삼십 이세였던 콩스탕은 영국의 예술위원회 Art Council of Great Bratain로부터 장학금을 받고 3개월 간 런던에 머물게 된다. 이때 헨리 무어, 안소니 힐, 케네스 마틴, 벨 니콜슨, 바바라 헵워스 등의 예술가들을 만난다. 이때 콩스탕은 캔싱턴 파크 가까이에 살았는데 매일 폭격으로 파괴된 도시를 거닐며 사람들이 도시에서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관찰하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는 3개월 뒤에도 런던을 떠나지 않고 머물면서 주변 도시의 구조가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걱정하였으며 당시의 상황이 즐겁고 창의적인 삶을 영위하기에 매우 부족함을 느낀다.
1956년 여름 아스게르 요른이 콩스탕을 이태리 알바에서 개최된 국제회의에 초대한다. “상상 바우하우스 움직임”이라는 타이틀로 개최된 회의에서 콩스탕은 “시심이 내일 우리를 살게 할 것이다”라는 제목으로 발표한다. 여기서 그는 자유로운 건축이 삶에 영감을 준다는 요지였다. 회의에 참석했던 문자주의자들 역시 예술과 기술을 한 데 묶어야 한다는 내용으로 발표한다. 후에 콩스탕은 드보르를 별도로 만나게 되는 데 이 만남이 서로에게 영감을 주는 계기가 된다. 1952년 드보르는 국제 문자주의 협회를 결성하여 글을 쓰고 영화를 만들며 전략적 행동주의자로 활약했다.
드보르는 좀 더 급진적인 모임을 결성하기를 바랬다. 기존의 예술을 완전히 거부하고 그 대신 심리지리학에 포커스를 집중시킬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1957년 아스게르 요른과 함께 상상바우하우스 국제 움직임과 문자주의를 통합하여 국제 상황주의자 그룹을 결성했다. 이들은 모든 기존 예술의 경향을 전면적으로 거부했다.
콩스탕은 상황주의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는상황주의자들 중에 공공의 이익보다 사심이 있는 멤버들이 있음을 느끼고 상황주의를 거부했다. 후일 상황주의자 그룹이 콩스탕과 드보르의 도시 설계 개념을 받아들이자 그때에서야 그룹에 합류했다. 콩스탕은 프랑스 상황주의 저널에 몇 편의 원고를 게재하고 1959년 파리와 암스테르담의 박물관에서 신바빌론을 가지고 여러 번 전시회를 열었다. 1960년 내부의 불협화음으로 인해 콩스탕은 상황주의 그룹을 떠난다.
런던을 떠나 다시 암스테르담으로 돌아 간 뒤 콩스탕은 건축과 도시 개발 프로젝트에 집중한다. 그의 목표는 일상의 삶 속에서 창의적 표현력을 가능케 하려면 예술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1956년에서 1974년 사이 콩스탕은 오로지 신 바빌론 프로젝트에 전념한다.
그의 세계 전체의 미래를 위한 비전은 토지를 공유하는 것이었으며 모든 것이 자동화 되어 일할 필요가 없어 사람들이 유목민처럼 창의적 방랑하며 유희의 삶을 영위하는 세상이었다. 신바빌론의 주민들은 모두 일에서 자유로워진 호모 루덴스였다. 창의력을 발휘하기 위해 반드시 예술을 해야 하는 세상이 아니었다. 매일 일상을 창조하는 삶이기 때문이다.
콩스탕은 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신바빌론 프로젝트는 행동에 대한 최소한의 조건 만을 제시한다. 행동은 가능한 자유로워야 한다. 자유로운 움직임에 대한 어떤 금지도, 분위기와 정서를 창조하는데 어떤 제한도 없어야 한다. 모든 것이 가능해야 하며 모든 일이 일어날 수 있으며 환경은 적극적 삶에 의해 스스로 창조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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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회
1974년 헤이그의 시립박물관에서 대대적인 전시회를 개최한 후 콘스탕은 프로젝트를 완료했다. 십여년간 제작한 모형의 숫자가 엄청났으므로 보관할 공간이 부족하여 박물관에서 모두 구매했다.
1999년 콩스탕의 신바빌론: 다른 삶을 위한 도시라는 제목으로 뉴욕의 드로잉 센터에서 전시회가 열렸다. 북미에서 첫 솔로 전시회였으며 마크 위글리가 큐레이터였다. 전시회를 기회 콘그레스가 개최되었으며 256 페이지 분량의 카탈로그가 출간되었다.
2016년 헤이그의 시립박물관에서 콩스탕 재단과의 협업 하에 지금까지 가장 광범위한 전시회가 개최되었다. 이를 위해 그가 “환경 Environment”라고 칭했던 구조물들이 재구성되었다. 예를 들어 1974년에 디자인한 “문의 미로”가 재구성되었으며 1968년 암스테르담의 역사박물관에 전시되었었던 놀이용 계단도 다시 만들었다.
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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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체험에 대한 대안을 마련하는 것이다. 이때 체험을 “상황”이라고 불렀다. 콩스탕은 1950년대에 이미 여러 해동안 신바빌론 프로젝트에 전념했다. 포스트모던한 사회의 윤곽을 표현하는 건축 모델을 여러 개 만들었다. 콩스탕의 신바빌론은 서로 연결되어 변형이 가능한 구조들로서 거의 소도시의 규모로 구상되어 메가 시티라고 불리기도 한다. 지상에 브루조아들의 세상을 내버려 두고 공중에 부양하는 메가 구조를 만들었으며 이곳은 새로운 인간형 호모 루덴스Homo ludens 들이 노는 곳이었다. 호모 루덴스는 본래 요한 하위징아[1]Johan Huszinga 1872~1945, 네덜란드의 역사가, 철학자. 문화사와 정신가가 … Continue reading가 도입한 개념으로 인간은 유희하는 과정에서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했다. 신바빌론의 브루조아들은 일과 가족과 사회적 책임에 묶인 반면 혁명 인간은 마치 집시처럼 방랑하며 새로운 감각적 체험을 한다. 아무에게도 묶에지 않고 잠자고, 먹고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 자신이 원하는 시간에 창조하고 생산한다. 콩스탕의 사회적 목표는 자기구현과 자기만족이었다. 추론적 생각, 목적 위주의 제품, 정치적 집단을 위해 짓고 개선하는 일 모두 거부했다. [2]Sarah Williams Goldhagen (July 2006) “ON ARCHITECTURE: Extra-Large”, in: The New Republ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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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 Karch, Matthias (2010): Vernetzte Struktur. Vorlesungsmanuskript. IMD Institute of Media and Design, Technische Universität Braunschweig.
관련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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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 Johan Huszinga 1872~1945, 네덜란드의 역사가, 철학자. 문화사와 정신가가 주관심분야였으며 1938년 호모 루덴스를 집필하여 사람은 유희를 하는 동안 자신의 능력을 가장 잘 개발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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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Sarah Williams Goldhagen (July 2006) “ON ARCHITECTURE: Extra-Large”, in: The New Republik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