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 (1729-17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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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shua Reynolds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 (1729-1797)의 초상화. 화가: Joshua Reynold (1723-1792), 1771년. 영국의 National Portrait Gallery 소장. source: Wikimed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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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x style=”1″]아일랜드 출신의 영국 보수주의 정치가. 정치적 권력남용에 반대했으며 시민의 행복과 정의를 실현하는 정치제도와 방법을 주장하였다. 미국 독립에 대해 우호적인 관점을 고수했고 누구보다 먼저 프랑스 혁명에 대한 입장을 밝히기도 했지만 그의 철학적 에세이 “숭고와 아름다움”을 통해 2세대 풍경화식 정원의 방향을 가리키고 낭만주의로의 길을 여는 데 기여했다. [/b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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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9년 2월 아일랜드 더블린(Dublin)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프로테스탄트(신교도)였고 직업은 변호사였기 때문에 부유한 환경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는 당시 부유층 자제들이 다녔던 퀘이크 기숙학교(Quaker boarding school)를 졸업하였다. 1744년 더블린의 트리니티(Trinity) 칼리지에 입학하여 고전을 공부하였으나 아버지의 영향으로 법과 제도에 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트리니티 칼리지 시절 주간지를 통해 나태한 부유층에 대해 몇몇 비판적인 기사를 작성하면서 글을 쓰는 능력을 인정받았다. 1750년 아버지의 권유로 런던으로 이주하여 법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법조인으로 경력을 쌓아야 했지만 오히려 저술활동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1756년 마침내 그의 첫 저작물인 사회평론집《자연적 사회의 옹호론 A Vindication of Natural Society》를 출간하였다. 이 책에서 그는 정치에 관한 추상적인 이론을 비판하였고 자연적인 사회를 옹호하는 주장은 현재 시민사회와 정부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했다. 1757년 두번째 저작물인 《고상한 것과 아름다운 것에 관한 우리의 관념 기원에 대한 철학적 고찰 Philosophical Enquiry into the Origin of our Ideas of the Sublime and Beautiful》을 발표하였다. 에드먼드는 런던에서 일약 유명한 저술가로 이름을 알리게 되었으며, 런던 최고의 명사들 모임인 더 클럽(The Club)의 창립 회원이 되었다. 하지만 저술가라는 직업은 그에게 안정적인 생활과 수익을 제공하지 못했다. 영국 역사에 관한 저술을 지속하면서 생활을 했지만 그가 꿈꾸는 이상적인 생활과 야심을 만족시키지는 못했다. 마침 결혼과 함께 에드먼드는 자신의 미래에 대한 고민을 한 결과 영국 정치계에 입문하게 되었다.

1759년 영국 정계 하원의원이었던 윌리엄 제라드 헤밀턴(William Gerard Hamilton)의 비서가 되었다. 헤밀턴이 아일랜드 총독의 비서였기 때문에 에드먼드는 아일랜드의 정치에 관여하게 되었다. 1765년 의회 내의 자유주의자를 중심으로 한 휘그당(黨)의 지도자이자 당시 수상으로 선출된 록킹햄 후작(Marquis of Rockingham)의 비서로 정계에 진출하였으며, 1766년에는 록킹햄의 지원으로 비교적 수월하게 하원의원으로 선출 되었다. 그는 1794년까지 의원으로 활동하였으며 그의 연설과 저술은 영국정치사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으로 평가받는다.

에드먼드 버크는 정치적 권력남용에 반대했으며 당시 무원칙한 과거의 정치적 행위를 비판하고 시민의 행복과 정의를 실현하는 정치제도와 방법을 주장하였다. 당시 뿌리깊었던 정치가의 이권개입으로 발생하는 부패를 경멸하였고, 단순한 법조문의 해석과 지배자의 권리의 주장, 정치적 관직과 명성을 추구하는 정치를 비판하였다. 그는 보편적 원리에 의해 판단하는 정치적 행위를 통해 국가의 이익과 정의를 실현하는 정치철학을 제시하였다. 그는 국왕 조지 3세(재위 1760~1820)의 제왕적 독재와 의회의 권력남용 정치를 비판하면서 영국 정치계의 유명 정치인으로 주목받았다. 1774년 4월 의회에서 아메리카 식민지에 대한 과세정책에 반대하였는데, 식민지에 요구되는 지나친 과세정책은 오히려 반발을 불러일으키는 결과를 가져와 영국과 아메리카 모두에게 이익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식민지를 지배하는 영국의 권리와 법적인 권한 보다 현지인과의 타협을 통해 보편적인 원리에 입각한 정책을 실현하는 것이 오히려 이익이 되며 정의로운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인도 통치에 관하여 당시 벵골 총독 워렌 헤이스팅스(Warren Hastings)를 탄핵하기도 하였다. 동인도 회사가 인도에서 벌인 사업으로 막대한 이익을 취득한 것은 현지인에 대한 정당하지 않은 권력남용으로 얻은 것이며 이는 의회의 견제를 전혀 받지 않는 폐단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그의 정치사상은 귀족적인 편견에서 출발한 것이었고 부르조아의 편향성은 1790년에 《프랑스혁명에 관한 고찰》을 써서 표현하였는데 이때 프랑스혁명의 과격화를 경고하였다. 또한 선거권 확대에 반대하여 일정한 자격을 가진 시민들에게만 선거권을 제공하는 것이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정치가로서 독재체제에 반대하였고 정당정치를 통해 권력의 남용을 견제하고 정의와 자유를 주장한 점은 정치사에서 높게 평가된다. 영국 보수주의 정치가이자 대표적 이론가로서 명성을 떨쳤다.

[네이버 지식백과] 에드먼드 버크 [Edmund Burke]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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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venhill (British Library official link)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에드먼드 버크의 장원 ” The Gregories”, 1768년에 이만파운드를 주고 구입했다. 1813년 화재로 손실되어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화가: Revenhill, 1792년 작. 그림은 현재 British Library에 소장되어 있다. source: Wikimed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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