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스 리버만(1847-1935)
막스 리버만(Max Liebermann, 1847년 7월 20일 ~ 1935년 2월 8일)
독일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활약한 사실주의 경향의 화가. 독일 모더니즘의 길을 연 선구자로 평가되고 있다.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인상주의 영향을 받았으나 끝까지 사실주의적 화풍을 고수했다. 베를린 분리파 Berlinr Secession의 창립자 가운데 한 사람이며 회장직을 역임했다.
부유한 유대인 사업가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가업을 물려받지 않고 화가의 길을 선택, 바이마르와 네덜란드에서 수학. 당시 풍미했던 아카데미 화풍에 철저히 반기를 들었으며 1872년 <거위 털을 뜯는 여인들>이란 제목의 그림으로 등단하여 물의를 일으켰다. 영웅적인 것과 아름다운 것만을 화폭에 실었던 시절에 수공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 그중에서도 여성 노동자들의 작업 광경이나 고아들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한 까닭에 <추한 것을 그리는 화가 또는 가난을 그리는 화가>라는 별명을 얻었다.
1909년 베를린 반제 호숫가에 빌라와 정원을 짓고 여름철을 빌라에서 보내면서 정원을 모티브로 이백 여점의 그림을 그려 발표하여 그의 빌라와 정원이 유명해졌다. 이 시기부터 프랑스 인상주의의 영향으로 색이 밝아지고 움직임을 담는 화풍으로 변해간다.
베를린 분리파 회장을 역임하며 19세기에서 20세기로 전환하는 모더니즘을 유도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1920년에서 1933년 나치가 권력을 장악할 때까지 프로이센 예술 아카데미 교수 및 학장직을 역임하면서 많은 젊은 예술가들을 지원하고 후원했다. 1933년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소외당한 채 베를린 자택에서 외롭게 지내다가 1935년 세상을 떠났다. 절친했던 예술가 중 오로지 케테 콜비츠Käthe Kollwitz(1867-1945)만이 그의 곁을 지켰다. 사후 그의 작품 이백 여점을 나치에서 몰수.
1995년 막스 리버만 협회가 설립되고 그의 여름 별장과 정원을 보수하여 2006년 기념관으로 오픈, 전시장, 문화행사장으로 쓰고 있으며 복원된 정원이 일종의 관광 명소로 부상했다.
목차
연혁
20.07.1847 | 베를린에서 부유한 유대인 방직 공장주의 아들로 태어남. |
1869 | 바이마르 예술 아카데미에서 수학 |
1873 | 파리와 바르비종 체류. 바르비종 파의 밀레 등과 네덜란드 고전주의 화가 프란스 할스 등의 영향을 받음. |
1874-1914 | 매해 여름에 네덜란드로 여행 |
1878 | 뮌헨으로 이주.
수공업 노동자들, 네덜란드의 농부들을 집중적으로 연구. <가난한 자들의 화가>라는 별칭을 얻음 |
1884 | 베를린으로 돌아 가 마르타 마르트발트와 결혼 |
1885 | 딸 케테 출생 |
1889 | 프랑스 혁명 백 주년 기념 전시회에 참여. |
1894 | 부친 사망. 브란덴부르크 문 바로 옆에 위치한 Pariser Platz 7번가로 유명한 베를린 집 물려받음. |
1897 | 왕립 예술 아카데미 교수로 부임 |
1898 | 베를린 분리파의 회장으로 추대됨. 독일 인상주의 파 결성. 이 시기에 리버만의 화풍에 변화가 옴. 색상이 밝아지고 화폭에 해변가에서 물놀이하는 시민들이나 승마 등 움직임을 담기 시작 |
1909/1910 | 베를린 근교 반제 호숫가에 빌라 건설. 이 정원에서 모두 이백 여점의 정원 그림과 그래픽 탄생 |
1920-1932 | 프로이센 왕립 예술 아카데미 학장 |
1927 | 베를린 명예 시민 |
1933
|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예술 아카데미 학장직에서 물러남. 나치의 압력을 받은 예술가 협회에서 유대인 예술가들의 작품을 더 이상 전시하지 않기로 결정함. |
1935 | 갑작스럽게 사회에서 외면당한 상태로 고통받던 중 자택에서사망 |
주요 작품(정원 그림을 위주로)
참고 자료
- Braun, G.&W. (hrsg.), Max Liebermanns Garten am Wannsee und seine wechselvolle Geschichte, Berlin Nicolai 2008
- Libermann-Villa am Wannsee Website ⇒
- Wikipedia.de/ Max Liebermann ⇒
© 서양 정원사 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