멘투호테프 2세의 장제전
멘투호테프 2세의 장제전은 왕가의 계곡 근처 데이르 엘 바하리에 위치하고 있다. 고대 이집트 중왕국 제11왕조대에 건립되었으며 데이르 엘 바하리에 있는 세 개의 장제전 중 가장 오래 되었다. 고왕국의 피라미드 형 무덤에서 신 왕국의 백만 년의 집으로 이전하는 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이집트 건축사, 문화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약 550년 뒤에 하트셉수트 여왕이 자신의 장제전을 지을 때 모델로 삼았다.
또한 장제전 앞에 정원을 조성했던 흔적이 발견되어 고대 이집트 신전 정원 연구를 위해 중요한 장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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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발굴사
제 20 왕조 대에 산사태가 일어나 완전히 묻혀버렸으며 19세기 중반에 발견되어 발굴이 시작되었다. 바로 옆에 있는 하트셉수트 여왕의 장제전이 먼저 발굴되었다.
1858년 프랑스의 이집트학 학자 오귀스트 마리에트가 데이르 엘 바하리에서 발굴 작업 시작. 하트셉수트 장제전 발굴 작업 중에 더 오래 된 것으로 보이는 기둥과 석조 블록을 발견하였는데 블록에 멘투호테프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 멘투호테프의 묘가 인근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1859-1860년 아일랜드의 더퍼린 남작이 이집트 인부들을 고용하여 일대의 발굴작업을 시작했다. 먼저 템 왕비의 묘가 발견되었고 그 다음 네페루 왕비의 묘 (TT319) 및 왕묘가 발견되었다. 이때는 일부만 발굴하는 데 그쳤다.
1893-1898년 앙리 에두아르 나빌이 영국의 이집트 탐사 재단의 의뢰를 받아 하트셉수트 여왕의 장제전 발굴 작업 재개. 발굴팀의 화가로 일하던 하워드 카터가 말을 타고 가다가 구덩이에 빠지면서 그 안에서 오래된 지하 왕묘 발견. 이를 “밥 엘 호산 Bab el-Hosan”이라 명명. 밥 엘 호산은 말의 문 (게이트)이라는 뜻이다. 아직 주인이 밝혀지지 않아 별명으로 불리고 있는 밥 엘 호산은 멘투호테프 2세 묘보다 더 오래 전에 조성된 왕묘로 추정되나 정확한 것은 모른다. 이 왕묘 위에 멘투호테프 2세의 장제전이 있음을 알게되어 발굴 작업을 완료했다. [밥 엘 호산에 대한 자세한 설명 ⇒ ]
1903-1907년 사이에 앙리 에두아르 나빌이 유적과 유물에 대한 연구 시작. 나빌은 스스로 멘투호테프 2세 장제전을 최초로 발굴하고 연구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발굴의 공은 아일랜드의 더퍼린에게 돌아가는 것이 맞다. 나빌은 이집트학 학자로서 발굴을 완성하고 체계적으로 연구한 업적을 인정받았다.
1920-1931년 미국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이 Herbert E. Winlock에게 의뢰하여 다섯 번 추가적으로 탐사하게 했으나 이에 대한 공식 보고서는 아직 출간되지 않았다. 후일에 에밀 바레즈가 이집트 고대학회의 의뢰를 받아 허버트 윈록의 작업을 정리하여 1942년 출간하였다.
1967-1971년 사이에 독일 고고학회의 의뢰를 받아 이집트 학자 Dieter Arnold가 발굴현장을 재정비하고 그간의 모든 연구 결과를 종합 분석하였으며 이를 정리하여 3권의 책으로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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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과 정원
진입로와 광장
전체적인 구조를 본다면 구 왕국의 피라미드와 마찬가지로 나일강 변에 “계곡 신전Valley Temple“이 조성되어 있었고 여기서 램프를 따라 장제전 앞 광장으로 연결되었다. 계곡 신전이란 일종의 게이트 건축으로 ‘강을 건너는 의식’을 위해 축조되었다. 나일강의 동쪽에서 서쪽으로, 즉 산자들의 세상에서 죽은 자들의 세상으로 강을 건너는 것이 이집트 종교의식 중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이때 강변에 별도의 신전형 건축을 세웠는데 이를 계곡신전이라 한다. 계곡 신전들은 나일강의 범람으로 대부분 침몰되어 현재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계곡 신전으로부터 길이 약 1.2킬로미터, 폭 46미터의 램프가 장제전 앞의 광장 정원으로 연결된다. 뒤에 있는 암산의 골짜기로 깊숙이 파고 들어간 장제전 광장에 정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나무를 열식하여 심고 왕의 왕의 좌상을 최소한 22구 배열했던 것으로 분석되었다. 아마도 한쪽에는 상이집트의 백색 관을 쓴 좌상을, 다른 한 쪽에는 하이집트의 붉은 관을 쓴 좌상을 배치했던 것 같다.[1]Dieter Arnold, Die Tempel Ägyptens. Bechtermünz Verlag 1996 [140-141]
정원
약 160미터에 달하는 광장 중앙축의 양변에 돌무화과 나무 Ficus sycomorus 를 열식하고자 계획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분석결과 준비해 둔 28개의 구덩이에 모두 나무를 심지 않고 8그루만 식재한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로 나무를 심었던 구덩이는 각 직경이 5-6미터, 깊이 9-10미터 가량이었다. 이를 위해 구덩이 가장자리에 나선형의 계단을 조성했다. 지반이 단단한 암석층이었으므로 깊이 뚫고 나일강의 점토로 채웠다. 뿌리가 일부 남아 있어 위성류 Tamarix 와 돌무화과를 심었음을 알게 되었다. [respons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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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무화과 사이에서 약 6.8미터 x 1.75~1.85 미터 크기의 화단이 발견되었다. 이 역시 나일강의 점토로 채워져 있었으며 식물의 흔적이 발견되었으나 아직 식물 분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화단의 기능과 용도 역시 불분명하다. 당시의 디자인 개념으로 미루어 보아 화단 하나 만을 배치하지는 않았을 것이므로 계획했던 화단들 중 일부만 완성된 것일 수도 있다. 위치로 보아 유용식물을 심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2]Dieter Arnold 1974: Mentuhotep. Bd. 1. p. 22, in: Michael Haase 2011
중앙축 양쪽으로 나무를 군식한 흔적이 있다. 좌측에 33그루의 돌무화과를 심고 우측에 22그루를 심었다. 이들 구덩이는 중앙축의 것보다 작게 뚫었으며 깊이 70센티미터에서 뿌리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이 수목정원의 기능과 역할은 종교적었던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구왕국 말기의 종교적 이념에 따르면 돌무화과 나무는 왕들이 하늘로 올라가기 위한 사다리 역할을 했었다. 본래 돌무화과 나무는 해가 뜨는 동쪽에 속한 나무였다. 반면 위성류는 지하세계의 신 웨프와웨트에 속한 나무였으며 웨프와웨트 신은 왕들의 부활과 관련되어 언급되었다.
그 외에 수목정원으로 부터 약 22미터 동쪽으로 떨어진 곳에 직경 약 13.5 미터의 원형 담장이 발견되었는데 그 내부에 정원을 조성했던 흔적이 있으며 중앙에 큰 돌무화과 나무가 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나무 아래 작은 제단이 서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나무 숭배 의식이 치러졌을 것으로 해석된다. 벽돌담의 연대로 미루어 멘투호테프 2세 때 조성된 것으로 분석되었다. 고대 이집트의 사후세계에서 돌무화과 나무에 신들이 깃든다고 여겼던 것과 연관지어 볼 수 있으며 누트 여신과 하토르 여신을 상징하는 신성한 나무로서 경배의 대상으로 작은 정원을 만들어 모셔두었을 것이다. [3]Michael Haase 2011: “Tempel und Gärten”, in: Christian Tietze, Ägyptische Gärten, Arcus-Verlag Weimar, p. 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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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실 Vestibule
본전은 테라스 형으로 축조되었으며 두 구역으로 구분된다. 앞쪽 테라스 (배치도 번호 3-4)는 두 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중앙에 피라미드를 두고 사방을 2층의 열주로 둘렀다. 뒤쪽 테라스는 긴 홀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앞쪽 테라스 중앙에 과연 피라미드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발굴 당시 터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나빌은 피라미드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 반면 후일 디터 아놀드는 피라미드가 하중을 견디지 못했을 것으로 보고 마운딩으로 그쳤을 것이라 짐작했다.[4]Dieter Arnold 1974: Mentuhotep. Bd. 1. p. 30, in: Michael Haase 2011 이 핵심구간은 묘가 아니고 이집트 창조신화에 나오는 “태고의 언덕”을 묘사했을 것으로 해석했다. 사방 22미터, 높이 11미터이다. 이 구역은 멘투호테프 2세가 몬수 신 Month, Menthu에게 바친 성역이다. 몬수 신은 고왕국부터 중왕국 대까지 테베의 수호신으로 매우 중요시 여겨졌었으나 신왕국에 들어서면서 아몬신이 우위에 서게 되어 의미를 잃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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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역
가장 뒷부분에 위치한 긴 홀형태의 건축 (배치도 번호 6)은 왕을 신성시하는 성역이다. 부분적으로 암반을 뚫고 들어가 조성되었다. 오픈된 홀을 지나면 열주로 이루어진 홀이 나타나는데 이곳이 왕의 상을 모셨던 곳이다. 이 구간의 부조 벽화에 신들이 왕을 영접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으며 신과 동등한 크기로 그렸다. 왕의 상과 아문레신의 상을 나란히 세웠다. 이로써 왕이 신으로 신분 상승한 것이다. 이제 신이 된 왕은 다른 신과 마찬가지로 예배의 대상이 된다. 멘투호테프 2세의 치세 말기에 여기서 아문레 신의 경배 의식이 치러졌으며 이로써 백만 년의 집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왕의 석묘
성역의 앞쪽 구역의 오픈된 홀 중앙에 왕의 석묘로 들어가는 통로가 있다. 여기서 지하로 약 150미터 램프가 연결된다. 통로 끝의 석실이 왕묘이며 내부는 완전히 장미석으로 이루어졌다. 왕의 미이라는 발견되지 않았으며 부장품들도 이미 모두 도굴된 상태였다.
왕의 묘 외에도 왕비 템의 묘와 여섯 후비 및 공주들의 묘가 발견되었다. 왕의 제1 왕비 네페루의 묘 (TT319)는 광장 하부에서 발견되었으며 매우 크고 화려하게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후일 하트셉수트 여왕의 장제전에 편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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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례 의식
멘투호테프 2세 대에는 몬수 신이 가장 크게 경배되었으며 아문신은 그 다음의 위치를 차지했다. 이 시기에 하토르 여신도 의미를 얻기 시작했으므로 장제선의 벽화에 수없이 등장한다.
장제전에는 전속 사제들이 소속되어 있어 의식을 주제했다. 멘토호테프 2세 대에 처음으로 “계곡 축제 Beautiful Festival of the Valley”가 개최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계곡 축제란 아문신을 배에 모시고 나일강의 서쪽으로 이동하는 의식을 말한다. 목적은 서쪽 왕가의 계곡에 있는 왕들의 묘에 참배하는 것이었으며 그 행렬이 장관을 이루었다. 수많은 벽화에 행렬이 묘사되어 있다.
멘투호테프 2세의 사후에는 새로운 종교적 흐름에 따라 몬수 신이 세력을 잃어 점차 아문 신전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후 120년 동안 더 이상의 건축이나 조각상들이 봉헌되지 않다가 세소트리스 3세가 비문을 하나 세웠으며 후에 신왕국에 들어가 하트셉수트 여왕을 통해 데이르 엘 바히라가 크게 부각되었다.
데이르 엘 바히라에서의 종교의식은 제 20 왕조 대까지 지속되었다. 이후 람세스 4세 혹은 6세 대에는 종교적 의미를 완전히 상실했으며 이곳의 석재를 가져다 새로운 신전을 짓는데 쓰기도 했다. 가장 뒤쪽에 세워졌던 투트모세 3세의 장제전은 완전히 드러내 갔으며 그 결과 산사태가 초래되어 멘투호테프 2세의 장제전이 완전히 흙속에 묻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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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
- Dieter Arnold: Die Tempel Ägyptens, Bechtermünz Verlag 1996
- Michael Haase 2011: “Tempel und Gärten”, in: Christian Tietze, Ägyptische Gärten, Arcus-Verlag Weimar
- Édouard Naville: The XIth dynasty temple at Deir El-Bahari (= Memoir of the Egypt Exploration Fund 30). Part 2. Egypt Exploration Fund, London 1910.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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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 Dieter Arnold, Die Tempel Ägyptens. Bechtermünz Verlag 1996 [140-1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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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Dieter Arnold 1974: Mentuhotep. Bd. 1. p. 22, in: Michael Haase 2011 |
↑3 | Michael Haase 2011: “Tempel und Gärten”, in: Christian Tietze, Ägyptische Gärten, Arcus-Verlag Weimar, p. 190 |
↑4 | Dieter Arnold 1974: Mentuhotep. Bd. 1. p. 30, in: Michael Haase 20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