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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트셉수트 여왕Queen Hatshepsut (1501~1480 BC 재위)

고대 이집트 신왕국 18대 왕조의 여왕. 투트모세 1세의 딸, 투트모세 2세의 왕비, 투트모세 3세의 어머니였다. 남편 투트모세 2세가 병약하여 일찍 죽자 아직 어린 투트모세 3세의 섭정을 시작했다가 곧 남장을 하고 스스로 왕으로 칭하는 대범함을 보여 결국 이집트 최초의 여성 파라오가 되었다.

탄생 신화

기원전 1495년경에 출생했다. 자신의 장제전 벽에 자신의 출생 신화를 기록하게 했다. 그에 따르면 아문레 신이 그녀 어머니 아모제 왕비의 미모에 반해 아버지 투트모세 1세로 변신하여 나타나 연을 맺었다고 한다. 그리고 앞으로 딸이 태어날텐데 하트셉수트라 부르라고 이르며 앞으로 왕이 되어 훌륭하게 통치하게 될 것이라 예언했다. 하트셉수트라는 이름은 “귀한 여인 중 가장 귀한”이라는 뜻이며 “아문 신이 껴안은 여자”라는 뜻으로도 해석된다.

하트셉수트 여왕. 데이르 엘 바하리 여왕의 장제전. © jeonghi.go

이집트학 학자들은 하트셉수트가 자신이 왕이 된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기록한 것으로 해석했었다. 그러나 이미 구 왕국의 제4대, 5대 왕조에도 유사한 내용의 텍스트가 전해지는 것으로 미루어 하트셉수트가 이야기를 꾸며낸 것이 아니라 구 왕국의 전통을 이어가려는 의식적 행위로 재해석되고 있다. 하트셉수트는 그 외에도 구 왕국의 전통을 이어받는 한편 이를 새롭게 해석하여 새로운 문화 사조를 만들어 내는 데도 일조했으므로 오히려 적절한 해석이라 볼 수 있다.

한편 그녀의 남편 투트모세 2세의 정통성을 위해서도 필요한 설화이기도 했다.  하트셉수트는 부왕 투트모세 1세의 명령에 따라 이복 남동생 투트모세 2세와 혼인한다. 적자가 아니었던 투트모세 II세는 나중에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정통성이 필요했으며 이는 대개 왕실의 딸과 혼인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신의 딸인 하트셉수트와의 혼인으로 투트모세 II세는 왕이 지녀야 하는 신성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때 하트셉수트의 나이가 12세 가량이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통치

부왕이 승하한 후 투트모세 2가  계획대로 왕위를 계승하였고  딸 둘을 낳았다. 투트모세 2세는 다른 부인과의 사이에 아들이 하나 더 있었다. 이 아들이 나중에 정복왕 투트모세 3세가 된다. 병약한 남편이 세상을 떠났을 때 투트모세 3세가 아홉 살의 어린 나이였으므로 하트셉수트가 섭정을 시작했다.

어떤 과정을 거쳐 하트셉수트가 파라오가 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추측만 난무할 뿐 정확한 정황은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그녀가 파라오 복장, 즉 남장을 하고 수염을 붙이고 대관식을 하는 장면이 그녀의 장제전에 묘사되어 있다. 그에 따르면 기원전 1477년 2월 8일에 당시의 전통에 따라 성대하고 엄숙하게 대관식이 치러졌다고 한다. 투트모세 3세 재위 2년 째였다. 그렇다고 해서 투트모세 III세를 폐위시키지는 않고 명목상 공동 통치자로 두었다. 그러나 실제 권력자는 하트셉수트였으며 투트모세 III세는 군사 훈련에 전력했다고 전해진다.

전쟁

정복 전쟁을 통해 왕의 힘을 인정받아야 하는 시대였으므로 하트셉수트 역시 여러 차례 정복 전쟁을 치렀다. 그녀의 명령에 의해 치러진 전쟁이었으나 실제로는 투트모세 3세가 지휘했다. 이를 통해 투트모세 3세는 전쟁의 기술을 충분히 연마할 기회를 가졌다.

푼트 원정대

하트셉수트의 업적 중에 가장 중요시 여겨지는 것이 푼트에 원정대를 보내 무역의 길을 다시 연 것이다. 이는 이집트의 경제 문화 발전에 큰 의미를 주는 사건이었다. 푼트는 황금의 나라 혹은 신들의 나라로 불리는 곳으로 종교의식과 장례의식에서 대량으로 쓰이는 유황과 몰약이 나는 곳이다. 유황과 몰약은 이집트 자체 내에서 생산되지 않기 때문에 아라비아 반도 등에서 오는 수입루트에 의존해야 했다. 이로써 푼트가 전설 속의 나라가 아니라 실존하는 곳임이 밝혀졌으나 지금도 그 위치에 대한 확신은 없다. 소말리아나 에리트레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트셉수트 여왕의 장제전에 홀 하나를 별도로 할애하여 푼트 원정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남겼기 때문에 이를 바탕으로  지역을  좁힐 수 있게 되었을 뿐이며 확증은 아직 없다.

이때 푼트에서 유황나무를 분째로 떠서 들여왔는데 이 사실이 서양 정원사에서 중요한 일화로 취급된다. 이렇게 수입해 온 나무를 자신의 장제전 정원에 심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유황나무는 사철 건조해야 생육이 가능하므로 기후 조건이 맞지 않아 결국 재배에 성공하지 못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건축사업

재위 초기부터 데이르 엘 바하리 언덕의 경사를 이용하여 자신의 장제전을 건설했다. 삼단 테라스 형의 거대한 건축으로 “이집트 건축 중 가장 독창적이고 중요한 작품” 중 하나로 평가된다.

사망

재위 22년째 되던 해 기원전 1457년  1월 14일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찍 통치를 시작했으므로  35세에 죽었다는 이론과 45~60세에 죽었다는 이론이 공존한다.  그녀의 석관에서는 치아 한 개만이 발견되고 사체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의 생전에 만들었던 부조나 조각상이 대부분 의도적으로 훼손된 흔적이 있다. 누가 어떤 이유로 훼손했는지에 대해서도 이론이 분분하지만 정설은 없다.

역사적 의미

하트셉수트 여왕의 통치하에 신 왕국이 크게 번영했다. 구 왕국의 전통을 다시 이어가되 사회 구성원 전체를 포용하는 혁신적 방향을 추구했다고 평가되고 있다. 문화적으로도 여러 방면에서 개혁이 이루어졌다. 통합적으로 하트셉수트 여왕의 통치 대를 이집트 역사상 가장 번영했던 시대에 속한다. 이로써 후계자 투트모세 3세가 수많은 정복 전쟁을 통해 유프라테스 강까지 영토를 확장할 수 있는 재정적, 사회적 기틀을 마련해 주었다고 보고 있다.

참고 문헌


  • Christian Tietze (edit.): Ägyptische Gärten, Eine Ausstellung im Römischen Museum der Stadt Köln vom 27. Mai bis zum 6. November 2011
  • Marianne Schnittger: Hatschepsut. Eine Frau als König von Ägypten. von Zabern, Mainz 2008
© 서양정원사 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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