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를레앙 공작 루이 필립 2세 (1747-1793)

오를레앙 공작 루이 필립 2세 (1747-1793). Louis-Philippe II. Joseph de Bourbon, duc d’Orléans. 루이 필립 조셉 도를레앙. 이름이 매우 복잡하여 대개는 오를레앙 공으로 불린다. 그의 평등 사상으로 인해 평등한 필리프Philippe Égalité라고도 불렸다. 프랑스 부르봉-오를레앙 왕실의 일원이며, 루이 필립1세 왕의 아버지이다. 

 

생애


친계로는 막강한 루이 필립 오를레앙 공작 가문, 모계로는 부르봉 가문의 직위와 유산을 물려받아 프랑스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청년시절에는 할아버지의 작위를 물려받아 샤르트르 공작이었다가 아버지의 사후에 오를레앙 공작의 작위를, 1769년 부르봉 가의 공주와 혼인함으로써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게 된다.

평등한 필리프, 오를레앙 공. 화가: Antoine-François Callet. 베르사이유 궁 소장. Permission: Public domain.

그는 이미 샤르트르 공작이었던 시절부터 루이 15세에 저항한 세력에 속했다. 그 때문에 1771/72년 궁에서 추방되었다. 루이 16세 때에도 이런 반골기질을 계속 발휘하여 왕실의 미움을 샀다. 특히 마리 앙트와네트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1778년 장교로 복무, 전투에도 참가했으나 왕의 명으로 해병대에서 명예 제대 하고 그 대신 후사르 기병대 장군이라는 명예 직분을 얻었다.

정치의 일선에서 소외되자 그는 유흥에 몸을 맡겼으며 영국을 자주 방문했다. 나중에 조지 4세가 되는 영국 황태자와 절친한 사이였다. 영국 매니아로서 파리 사교계에 영국풍을 유행시켰다. 그는 민중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파리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후한 선물을 자주 주었으며 공공배식센터 등을 설치했다. 오를레앙 가문의 소유였던 팔레 루아얄Palais Royal 정원을 민중들에게 개방했다.

1785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오를레앙 공작 작위를 물려받았다. 영국식 자유정신을 공공연하게 표현했으며 프랑스의 왕이 되고자 한다는 소문이 돌아 1787년 유배당했다. 삼부회 (귀족, 가톨릭 고위 성직자, 평민)가 결성되자 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팜플렛을 만들어 배포하는 등 열성을 보였으며 세 개의 지역구에서 의원으로 당선되나 그 중 크레피 엉 발루아의 대표가 되었다. 귀족부의 의원으로서 소수에 머물렀던 자유 전선의 선두가 되었다. 이 자유 전선을 이끌던 인물은 아드리앙 뒤포르 Adrien Duport였다.

1789년 6월 오를레앙 공작은 귀족부 중에서 40명을 이끌고 평민부에 합류. 여름 혁명 때 정확하게 어떤 역할을 했었는지에 대해서는 지금도 사학계에서 논란이 그치지 않는다. 왕실은 오를레앙 공이 바스티유 습격을 배후에서 조종했다고 비난했다. 오를레앙 공작이 마리 앙트와네트 왕비를 경멸하고 궁에서 오랫동안 유배되었던 사실에 대해 몹시 언짢아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는 정부의 철저한 혁신을 요구했고 영국의 본을 따라 헌법을 도입할 것을 제안했다. 그를 왕으로 추대하려 했던 세력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오를레앙 공 자신은 왕으로 추대되는 걸 원치 않았다는 설이 있다. 그의 미스트레스 콩테스 드 뷔폰Comtess de Buffon 이 영국의 레이디 그레이스 돌림플 엘리엇에게 털어놓은 바에 의하면 공작은 바스티유 습격이 있던 날 낚시를 갔었다고 한다. 공작은 미국으로 망명할 것도 고려했으나 콩테스 드 뷔퐁이 말려 파리에 남았다고 한다. 1789년 10월 5일, 그 유명한 베르사이유 행진을 종용한 것도 오를레앙 공이라고 비난을 받았다. 오를레앙 공을 질투했던 라파엣 백작Marquis de La Fayette 은 루이 16세를 설득하여 오를레앙 공을 영국에 사절로 보내 프랑스에서 격리시키라 청했다. 공작은 영국으로 보내져 1789년 10월 14일부터 1790년 7월 까지 영국에 머물렀다. 이 때 작곡가 조셉 볼로뉴와 팬싱고사 쉬발리에 드 생조르쥬가 동행했다. 1790년 7월 7일 귀국하여 의회에 다시 참석. 10월 3일, 의회로부터 베르사이유 행진과 무관함을 인정받았다.

공포 정치 시대


이 시기에 공작은 귀족들의 해외 도피를 도왔다. 이 무렵 파리 시민들이 그를 평등한 필립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의회에 참석해서 조심스럽게 행동했으나 루이 16세의 재판이 시작되자 결정을 내려야 했고 루이 16세의 처형에 찬성표를 던졌다. 이로써 과반수가 성립되었다. 비록 루이 16세의 처형에 찬성했음에도 아직 왕실에 충성한다는 의혹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예를 들면 해외로 도피한 귀족들과의 친분, 친척 관계 등이 문제가 되었다. 그의 아들이 망명하자 1793년 오를레앙 공작을 포함한 모든 부르봉가의 일족이 모두 체포되었다. 10월 3일 고소되었고 11월 6일 사형 선고가 내려졌으며 즉석에서 기요틴으로 끌려가 형장의 이슬이 되었다.

오스트리아, 미국 등지에서 망명의 세월을 보냈던 그의 아들은 나중에 왕정 복고 후 루이 필립 1세 왕이 되었다(1830-1848).

오를레앙 가문


오를레앙 가문은 공작의 배신 행위, 즉 루이 16세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데 일조했다는 사실로 인해 오늘까지도 배신자의 후손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부르봉 왕족이 멸족된 후 1883년 그의 후손들은 공식적으로 프랑스 왕족으로 인정되었다.

몽소 공원


지금 파리 북서쪽 8구와 17구 사이에 위치한 시민들의 오아시스 몽소 공원은 오를레앙 공작 소유의 땅이었는데 화가며 극연출가 루이 까르몽뗄에게 의뢰하여 폴리 정원으로 꾸몄던 것을 1860년 시에서 토지를 매입하여 반은 주택지로 개발했고 나머지를 공원으로 개방했다. 몽소 공원은 영국 풍경 정원의 개념으로 조성하여 정원의 역사적 관점에서 매우 중요한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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