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쪽: 뭐 이런 경우가! – “밥 엘 호산 Bab el Hosan” 추적기

데이르 엘 바하리를 설명하기 위해 배치도 범례를 만드는 중이었습니다. 그중 밥 엘 호산 Bab el Hosan이라는 축조물이 나오는데 이것이 뭐 하는 건지 모르겠더군요. 금시초문이었습니다. 위키 백과에서도, 내가 가진 열 권이 넘는 이집트 참고서적에서도 밥 엘 호산이라는 용어에 대한 설명이 없었습니다. 뭐 이런 경우가 …. . 직접 찾아내야 하나? 긴 추적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집트 정원에 대한 책을 읽다 보면 반드시 데이르 엘 바하리라는 곳이 언급됩니다. 세 명의 파라오들 장제전이 있는 곳입니다. 더욱이 멘투호테프 2세하트셉수트 여왕의 장제전에서 정원의 흔적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정원사에서 무척 중요시 여기는 곳입니다. 물론 지금은 정원을 전혀 알아볼 수 없습니다. 나무를 심었던 구덩이와 T 자형 연못 자리가 남아 있을 뿐입니다. 풀포기 하나 나지 않는 사막인데 그 옛날 그곳에 웅장한 장제전을 짓고 연못을 파고 나무를 심어 정원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멘투호테프 2세의 장제전 정원은 수목정원이라고 불리고 하트셉수트 여왕의 정원은 연못정원이라 불립니다. 물론 여왕의 정원에도 나무가 있었지만 서로 구분하고 기억하기 좋게 그리 부르는 것입니다. 우선 멘투호테프니 하트셉수트니 하는 이름들부터 발음하기도 어렵지만 기억하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이들을 기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깊숙이 추적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이름도 익숙해지고 나중에는 마치 잘 아는 사람처럼 친해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이 만들었다는 장제전이나 장제전 정원도 저절로 기억하게 되는 것이죠.

시대적으로 보면 멘투호테프 2세가 약 550년 앞섭니다. 하트셉수트 여왕은 자신의 장제전을 지으면서 의도적으로 아주 오래 된 선조의 본을 따라간 겁니다. 예를 들어 이성계가 새로운 왕조를 세우면서 고려를 건너 뛰어 저 멀리 고구려나 단군 조선 쪽에서 뿌리를 찾았다고 가정한다면 그것과 흡사했을 겁니다. 매우 영리한 한 수였습니다. 하트셉수트는 정상적으로 왕위를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아들의 섭정을 하다가 스스로 왕관을 쓰고 왕이 되었습니다. 대찬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왕위의 정당성을 증명하고 왕조에 대한 이념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를 위해 550년을 거슬러 올라가 멘투호테프 2세에 맥을 댔던 겁니다.

그러니 하트셉수트 여왕의 장제전을 파악하려면 그 모델이 되었던 멘투호테프 2세의 장제전을 먼저 파악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래서 일단 데이르 엘 바하라에 있는 세 장제전의 배치도를 구해서 범례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중 밥 엘 호산Bab el Hosan이라는 축조물이 있었는데  배치도 상에선 램프같이 생겼습니다(아래 배치도 참조). 그런데 왜 램프라고 하지 않고 굳이 밥 엘 호산이라 했을까. 뭔가 이상하다. 밥 엘 호산이 뭘까. 손 쉬운 위키 백과에도 나와 있지 않기에 내가 소장하고 있는 열 권의 이집트 참고 서적을 다 뒤졌습니다.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뭐 이런 경우가…..

이제 방법은 하나. 고고학자들의 도움을 받는 수 밖에 없습니다. 그들이 운영하는 웹사이트에 들어가 봐야 합니다. 다행스럽게도 고고학자와 이집트 학자들은 자기들의 발굴 작업을 인터넷에 소상히 보고합니다. 그러나 거기서도 쉽게 찾아지지 않았습니다. 오기가 났습니다. 그래서 소매를 걷어붙이고 본격적인 탐색에 나섰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오래 뒤적거리던 끝에 엘케 노페스Elke Noppes라는 여인이 운영하는 멘투호테프 2세 전문 웹사이트를 찾았습니다. 거기 밥 엘 호산이 언급되어 있는 겁니다! 내용을 보니 매우 전문적이고 충실했습니다. 엘케 노페스라는 이름이 낯설기에 검색해 보니 이집트학자나 고고학자는 아니고 사학자로서 이집트 매니아인 듯 했습니다. 칼 레저 박사 Dr. Karl H. Leser와 볼프람 그라예츠키 박사 Dr. Wolfram Grajetzki의 도움을 받아 홈페이지를 만들었다고  쓰고 있는데 이 두 사람은 내게도 그새 익숙해진 이집트학 학자들입니다.

이 정도 정성이면. 신뢰가 갔습니다.  그래서 자세히 읽기 시작했죠. 종합해 보면 경위가 이러합니다. 시간을 좀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Lepsius Tf. I 68_cut 1

렙세우스 이집트 탐사 보고서 부록 동판화 68번. 에른스트 바이덴바흐의 그림. Source: Lepsius-Projekt Sachsen-Anhalt

위의 그림을 보면 어쩐지 아라비안 나이트가 떠 오릅니다. 북극성이 반짝이기 때문인지요. 데이르 엘 바하라 계곡을 그린 것입니다. 이곳에 처음 나타난 유럽인들은 독일의 렙시우스 교수의 탐사팀이었습니다. 위의 그림은 1843년에서 1844년 사이에 렙시우스 교수 일행에 속했던 화가 에른스트 바이덴바흐가 그린 것입니다. 탐사단에는 화가들이 늘 따라다녔습니다. 렙시우스 교수는 베를린 왕립대학 이집트학과 학장이며 이집트 박물관장을 지냈던 저명한 인물로서 독일 이집트학을 정립한 사람입니다. 그가 19세기 중반에 데이르 엘 바하리 계곡을 방문했을 때는  지금과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굴곡진 모래 언덕에 작은 수도원의 폐허가 하나 서 있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림에 보면 언덕 위에 작은 상자 같은 것이 서 있는데 이것이 파란 예배당 Blue Chapel이라 불리는 것이고 그 뒤에 수도원의 폐허가 있습니다. 파란 예배당이라니 무척 신비스럽게 들리지만 그에 대해서도 더 이상의 이야기가 전해지지 않습니다.

언덕 뒤에 희게 빛나며 우뚝 서 있는 높은 산. 그 발치에 웅장한 장제전 세 채가 묻혀있다고는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습니다. 렙시우스는 일단 둘러만 보고 되돌아 갑니다. 독일식이죠. 꼼꼼하게 살피고 분석한 뒤에 철저히 계획을 세워 발굴작업을 한다는 원칙.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과연 기다려 주었을까요?

장면을 바꾸어 프랑스의 오귀스트 마리에트Auguste Mariette (1821-1881)라는 인물의 행적을 좀 추적해 보고자 합니다. 데이르 엘 바히라의 발굴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마리에트는 젊은 시절 시골에서 교사를 하다가 1849년 파리 이집트 박물관에 취직을 했습니다. 아마도 수완이 무척 좋고 대범하게 밀어붙이는 타입이었던 듯 합니다. 벌써 그 이듬해 루브르 박물관으로부터 이집트에 가서 고문서들을 좀 구입해 오라는 의뢰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집트에 갔는데 구매 협상이 질질 끌어 지루해지자 유적지를 찾아 돌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사카라에서  스핑크스를 하나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여기에 신성한 황소의 신 아피스를 모시는 신전 (세라페이온 혹은 세라페움)이 있을 것으로 짐작했습니다. 고고학도 이렇게 소질이 있어야 합니다.  스핑크스 하나를 보고 아피스 신전의 존재를 짐작하는 직감이 필요했던 겁니다. 나중에 보게 되겠지만 마리에트는 이런 직감의 소유자였던 것 같습니다. 아니면 눈이 렌트겐이었거나. 땅 속에 뭐가 묻혀있는지 정확히 짐작했습니다. 그는 당국의 허가도 받지 않은 채 인부를 사서 스핑크스 주변을 파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정말로 지하 신전을 발견합니다. 세기의 발견이라 해도 좋았습니다. 모두 24구의 석관외에 수천 점의 귀한 유물이 있었으니까요. 석관 하나가 80톤 정도 나갔는데 거대한 화강석 덩어리를 파내서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뚜껑이 열려있고 관 속은 비어있었습니다. 모두 도굴해 간 것입니다.

마리에트는 이후 약 칠 전 점의 유물들을 파리로 몰래 실어날랐습니다. 1854년 귀국하자 영웅 대접을 받았으며 루브르의 이집트 박물관 부소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1857년 다시 이집트로 떠나 여러 곳을 다니며 발굴작업을 지속했습니다. 그리고 1858년, 드디어 데이르 엘 바히라 골짜기에 나타난 겁니다. 둘러만 보고 돌아 간 렙시우스와는 달리 그는 바로 언덕을 들어내기 시작했습니다. 하트셉수트 여왕의 장제전이 모습을 나타냈습니다. 거기서 돌로된 블록을 하나 찾아냈는데 이 블록에 멘투호테프 2세 왕의 이름이 쓰여있었습니다. 하트셉수트 여왕의 장제전은 원형이 거의 보존되어 있고 규모도 커서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냈겠지요. 그 옆에 있던 멘투호테프 2세의 장제전은 폐허가 되다시피했으므로 거대한 기둥 몇 개만 우선 발견된 겁니다. 마리에트는 이곳에 제11왕조대의 장제전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발굴된 유물들을 카이로 박물관에 보냈습니다.

이 시기에 마리에트의 심경에 변화가 온 듯합니다. 이집트에 대해 진정한 애정을 갖기 시작한 겁니다. 발굴된 유물들이 이집트에 머물러야 한다는 입장을 피력하기 시작했고 그 덕에 이집트 총독으로부터 문화재 관리 총책임자의 직책을 부여받게 됩니다. 1859년에는 지금의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의 전신이 되는 박물관을 설립했습니다. 1867년 파리에서 열린 세계박람회에 출품되었던 이집트 보물이 프랑스 황비에게 “증정”될 뻔한 것을 막아냈다는 일화도 전해집니다.

마리에트는 그후에도 발굴작업을 계속하여 아비도스, 에드푸 등의 중요한 신전을 찾아냈으며 사카라에서 제 6 왕조 대의 피라미드 3구를 여는 것을 마지막으로 카이로에서 세상을 떠납니다. 그의 유해가 카이로의 이집트 박물관 정원에 묻히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그의 사후에 아이다가 초연되었는데 극본의 아이디어를 제공한 것도 바로 마리에트라고 합니다.

Маріетт

오귀스트 마리에트는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 정원에 안장되었다. 그의 묘와 동상. Photo: Kamelot, Public Domain. Thnak you Kamelot!


다시 데이르 엘 바하리 계곡으로 돌아가보면 1859년, 즉 마리에트가 하트셉수트 여왕의 장제전과 멘투호테프 2세의 장제전 흔적을 발견한 그 이듬해 아일랜드 청년 한 명이 이 골짜기를 찾아옵니다. 프레데릭 더퍼린 남작이었습니다. 본래 이집트 유람을 하고 있다가 보물을 찾을 생각으로 인부들을 사가지고 데이르 엘 바하리로 가서 땅을 파기 시작한 겁니다. 그러다가 본인도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멘투호테프 2세 장제전의 일부를 발굴하게 됩니다. 본국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자 카이로에서 – 당시 카이로는 보물찾기 하려고 온 유럽인들로 붐볐는데  – 두 명의 유럽인들을 찾아 내어 발굴을 지속해 달라고 부탁하고 떠납니다. 이때는 이미 마리에트와 이집트 문화재청에서 발굴한 유물의 해외 반출을 금하기 시작한 때였습니다. 그럼에도 더퍼린 남작은 아문 신의 좌상과 멘투호테프의 제단을 비롯해 수많은 유물을 아일랜드로 가지고 갔습니다. 자신의 저택에 모셔두었던 것을 남작 사후에 빚 대신 런던의 크리스티로 넘어갔고 거기서 경매에 붙여 세계 여러 나라의 박물관으로 팔려가게 됩니다.

그로부터 근 사십 년 동안 데이르 엘 바히르 골짜기에서는 발굴 작업에 큰 진척이 없었습니다. 1893년 프랑스 계 스위스 학자 앙리 에두아르 나빌이 발굴작업을 재개할 때 까지는. 이제 영국 청년 하워드 카터 Howard Carter (1874-1939)가 등장할 차례입니다. 하워드 카터는 어려서부터 그림에 소질을 보여 17세부터 이집트 발굴단에 속해 그림을 그리다가 나중에 발굴 작업도 했으며 무엇보다도 투탕카멘의 석묘를 발견하여 역사에 길이 남게 된 인물입니다. 그건 나중 일이고 1898년에는 하트셉수트 장제전의 발굴 책임을 맡았던 앙리 에두아르 나빌 팀에 속해 일하고 있었죠. 어느 날 말을 타고 퇴근하다가 갑자기 땅이 꺼지는 바람에 말과 함께 구덩이에 빠지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비가 온 뒤여서 모래층이 부드러워지며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이집트에는 평균 일 년에 한 번 정도 비가 온답니다. 바로 그 하루를 맞추었으니 운도 있어야 합니다. 이때 생긴 구덩이에서 계단이 얼핏 엿보였습니다. 알고 보니 이 구덩이가 지하 석묘로 통하는 게이트였습니다. 카터는 이곳을 직접 탐사하고 싶었으나 아직 나빌 팀에 묶인 상황인데다가 직접 발굴할만한 재정 능력도 없었습니다.

이듬해, 상 이집트 구역의 발굴책임자로 임명되는 행운을 얻게 됩니다. 때가 온 것입니다.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 보니 지하 17미터 깊이로  램프가  40미터 내려가고 그 끝에 석문이 하나 나타났습니다. 석문의 두께가 무려 3.75미터였다고 합니다. 이 석문 뒤에는 다시 약  150미터 길이의 통로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산 속 암반을 깊이 뚫고 연결된 통로입니다. 그 끝에서 또 하나의 석실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석실 속에서 카터를 기다린 것은  빈 목관 하나와 멘투호테프 2세의 상 하나 뿐이었습니다. 얼마나 실망이 컸을까요.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이 석묘가 실은 멘투호테프 2세 장제전의 앞마당에 있던 것이었습니다. 왜 앞마당에 텅빈 묘를 만들었을까. 기능이 무엇일까에 대해 학자들이 아직도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도굴꾼들을 피하기 위한 일종의 가짜 묘일것이라는 이론이 가장 유력하지만 – 지난 번에도 얘기했지만 고대 이집트에도 이미 도굴꾼들이 있었으니까요.  – 오시리스의 지하 성역일거라는 설도 있습니다.

아직 주인을 찾지 못한 이 지하 석묘가 바로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밥 엘 호산“이었습니다. “말馬의 게이트“라는 뜻이랍니다. 말이 게이트를 찾았다 해서 그리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아직 묘의 주인이 누구인지 규명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식 명칭을 얻지 못하고 여전히 “밥 엘 호산”이라고만 불리고 있는 겁니다.


아래 사진 중 왼쪽의 것은 밥 엘 호산의 첫 번째 램프와 그 끝에 나타난 석실 문이고 오른쪽 사진은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나중에 다시 막아 둔 장면입니다. 지금도 밖에서는 알아 볼 수 없습니다.

 


아래 도면 중 1이 바로 나를 고생시킨 밥 엘 호산입니다.

데이르 엘 바하리에 있는 세 장제전 배치도. Graphic: Gérard Ducher, modified by Janmad, further modified by thirdspace

Hatschepsut Tempel (11)

데이르 엘 바하리의 최근 전경. 하트셉수트 여왕의 장제전이 지배적. 왼쪽에 보이는 낮은 대가 멘투호테프 2세의 장제전 터. © buxhoeveden


참고 자료 / 관련 링크


© 고정희의 홉하우스 읽기

[gap height=”30″][clear]

댓글 남기기

I footnot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