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쪽: 석류, 풍요의 여신이 성직자로 변한 사연

[석류나무는 본문 18쪽에 처음으로 언급됩니다. 아래의 글은 석류에 대한  것인데 2010-2011년까지 환경과 조경에 연재한 식물 이야기 중 일부를 그대로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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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 유역 어디에서나 자라는 석류나무Punica granatum. 꽃이 지고 열매를 맺는 중. © jeonghi.go

장미가 예나 지금이나 꾸준히 상징계의 왕좌를 지키고 있다면, 예전에는 장미도 감히 넘보지 못할 최고의 상징성을 가지고 있었으나 지금 건강음료가 되어 돌아 온 식물이 있다. 숙종이 그리 좋아했다던 석류다. 석류의 뛰어난 효능 때문에 요즘 세상이 좀 시끄럽다. 항암효과에 대한 연구가 한창 진행 중이라고 한다. 한국에서도 수년 전에 ‘미녀는 석류를 좋아해.’라는 광고를 선두로 석류음료가 인기를 끌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석류의 효능이 뛰어난 것은 비타민, 칼륨, 칼슘, 철분 등의 성분이 듬뿍 들어 있기도 하지만 항산화성분이 풍부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심장의 혈액순환을 돕고, 동맥경화 치료에도 많은 효과를 보이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석류가 몸에 좋은 열매인 것만은 틀림없는 듯하다. 서구의 경우, 칵테일을 만들 때 석류 시럽Grenadine을 몇 방울 떨어뜨리는 외에 그다지 쓰임새가 없던 것이 요즘 석류 즙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석류는 과육이 없어서 과일이라고 하기 어려운 열매이다. 껍질이 단단하지만 그렇다고 견과도 아니니 사실 어디에도 분류해 넣기가 애매하다. 석류는 석류일 뿐인 것이다. 비슷한 것을 찾을 수 없는 유일무이한 존재가 석류이다. 하늘의 착오로 인해 보석이 되려던 것이 열매로 변한 걸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준보석 중에서 석류석이라는 것이 있기는 하다.
석류의 단단한 껍질을 벗기면 빨간 구슬들이 쏟아져 나온다. 씨앗이 이처럼 아름다운 식물은 석류밖에 없을 것이다. 대략 석류하나에 사백 개 정도의 씨앗이 들어 있다고 한다. 이 씨앗 하나하나가 엷은 투명 막으로 싸여 있고 이 막은 빨간 즙으로 가득하다. 바로 작은 씨를 감싸고 있는 빨간 즙을 사람들이 먹는 것인데 그게 쉽지 않다. 석류 열매의 구조를 보면 씨앗을 보호하기 위해 엄청난 공을 들인 것처럼 보인다. 단 하나의 씨앗이라도 허투루 낭비되지 않게 하려는 조물주의 뜻이 보이는 듯싶다.

석류의 원산지는 터키와 팔레스티나 일대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에는 고려 시대에 중국을 통해서 도입되었다고 한다. 석류의 학명인 Punica granatum에서 푸니카는 페니키아를 말한다. 그라나툼은 많은 씨앗이라는 뜻이다. 페니키아인들이 교역로를 타고 석류를 지중해에 퍼트린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석류를 “페니키아의 사과”라고 부르기도 했다. 석류의 이름에 사과가 들어감으로 해서 간혹 혼선이 빚어지지 않았나 싶다. 지중해와 팔레스티나에서 석류가 가지는 상징적 의미와 중서부 유럽에서 가지는 사과의 상징적 의미가 매우 흡사하다. 풍요, 생산, 자손 번식. 사랑.

덥고 건조한 지역 출신인 석류는 알프스 이북의 유럽에서는 잘 자라지 않는다. 대개는 온실 재배나 화분 재배를 한다. 추운 지방에서 가장 중요한 열매가 사과였다면 덥고 건조한 지방에서는 석류였다고 할 수 있겠다.

석류가 풍요와 생산, 번식의 상징이기 때문에 결국 그리스에서 또다시 아프로디테와 디오니소스와 만난다. 고대에선 풍요와 생산과 사랑이 모두 하나의 개념으로 이해되었으므로 꽃과 열매에 얽힌 거의 모든 신화에 아프로디테와 디오니소스가 결부되어 있다. 족보를 따져 올라가면 기원전 사천년 경에 이미 메소포타미아의 아스타르테 신에게 바쳤던 열매가 석류였다는데, 아스타르테는 메소포타미아의 풍요와 잉태의 여신으로서 이집트의 이시스와 그리스의 아프로디테의 전신이다. 아프로디테가 가장 사랑했던 나무가 석류나무라고 전해지는 외에도 석류는 그리스 신화에 비교적 자주 등장한다. 그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이 지하의 여신 페르세포네에 얽힌 이야기이다. 지하의 신 하데스가 페르세포네에 반해서 지하세계로 납치해간다. 제우스가 – 자기 딸인데도 – 모른 척하자 페르세포네의 어머니가 울면서 온 세상을 다니며 식물을 모두 말라죽게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귀찮음을 극복하고 제우스가 나선다. 그런데 그냥 구해준 것이 아니라 조건을 내건다. 지하세계에서 아무 것도 먹지 않아야 되돌아오게 해 준다는 거였다. 페르세포네는 그 말대로 아무 것도 먹지 않아서 지상으로 오게 되었는데 올림포스에 도착하는 순간 하데스가 재빨리 석류 씨 세 개를 페르세포네의 입 안에 밀어넣었다고 하다. 먹은 것도 먹지 않은 것도 아니기에 이후로 페르세포네는 일 년 중 석 달은 지하세계에서, 나머지 기간은 지상에서 보내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누가 보더라도 겨울의 유래에 대한 신화이다. 아마도 켈트족의 계절 신화와 서로 만나면서 사과가 석류로 둔갑한 것이 아닐까 싶다. 겨울이 없는 곳에서 자라는 석류가 하필 겨울 신화에 연루된다는 것이 모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석류가 가장 큰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던 곳은 유대지방이었다. 신이 이스라엘을 축복하여 일곱 가지 식물을 내리셨는데 그것이 밀, 보리, 포도, 무화과, 석류, 올리브, 대추야자였다. 그 중에서도 석류는 가장 성스러운 열매로 여겨졌다. 껍질은 하나님의 나라고, 보석과 같은 많은 씨는 율법으로 해석되었고 그래서 신의 계명의 상징이 되었다. 아마 이 먹음직스런 열매가 실은 먹기 어렵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율법처럼. 율법의 상징이므로 신전에 바칠 수 있는 유일한 열매이기도 했다. 언약궤라고 해서 십계명 석판을 보관했던 상자에 석류 문양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제사장들의 옷에도 석류 문양을 그려 넣었었다고 전해진다.

이런 석류의 종교적 상징성은 기독교의 전파와 함께 유럽 대륙으로 건너온다. 그런데 일단 석류를 실물로 볼 수 없는 상태에서 ‘페니키아의 사과’라는 이름과 높은 상징성만을 알게 된 유럽 사람들이 석류를 사과와 혼동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왕의 상징인 황금사과를 석류로 대체한 왕실도 있었다. 영국 헨리 4세가 그 경우였다. 석류의 붉은 색으로 인해 피, 사랑, 전쟁 그리고 힘의 상징이 되기도 했기에 더더욱 왕의 상징으로 쓰일 자격이 있어보였다.

이후 기독교에서 석류의 상징성은 여러 번 변모를 한다. 지중해적 풍요, 번식, 사랑의 의미와 동일시되었다가 점차 사라지고 형이상학적인 사랑, 즉 ‘이웃에 대한 사랑’의 상징이 되었다가 하나의 껍질 속에 모여 있는 신앙공동체, 즉 교회 전체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다가 “단단한 겉껍질 속에 부드러운 영혼을 담고 있는” 성직자들의 상징으로 변모해 갔다. 이 상징성은 성직자들이 직접 만들어 낸 것이 아닐까 싶다.

성직자 – 이것이 석류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리고 수백 년, 먹기가 불편해 다른 열매들처럼 꾸준히 과일 역할을 하지 못하다가 칵테일의 재료가 되어 디오니소스를 즐겁게 하더니 지금은 미녀의 상징이 되어 아프로디테로 당당히 돌아왔다. 식물 영혼론자라면 “미녀는 석류를 좋아 해” 라는 광고 뒤에 석류의 혼이 숨어 있다고 쾌재를 부를 것이다.

석류에 대한 식물 정보 


참고 문헌:

  • 고정희 : “석류의 길 – 풍요의 여신이 성직자로 변한 사연 – 사람과 같이한 식물의 긴 역사 9, 환경과 조경 11/2011
  • Hans Biedermann: Knaurs LEXICON, SYMBOL Knaur Verlag 2000
  • Marina Heilmeyer (2010): Sprache der Blumen, Bassermann 2010

© 고정희의 홉하우스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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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footnotes